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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  
  전경원 
Subject >>  
 『한국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
2017.07.12.(수)
역사역구모임 발제 전경원

『한국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역사비평사, 2017)

제1부 한국사회와 사이비역사학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또 다른 ‘역사파시즘’은 우리나라 상고사를 주된 연구 대상으로 하며, 과거 국가의 국력과 영토에 이상 집착하는 일련의 비합리적 행위들을 말한다. 이를 ‘사이비 역사학’이라 지칭할 것이다. 다양한 해석 가능성이 존재하는 역사 연구에서 ‘사이비’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폭력적인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들이 이미 학문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14쪽)

“그렇게 ‘사이비’라고 규정짓고 얘기하는 것이 학계의 고민을 대중화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또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294쪽)

▶ 대단히 위험하고 무서운 폭력이 아닐까? 마치 조선시대 주자의 해석과 달리 새로운 견해와 관점으로 유학을 재해석 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며 비난을 받고 결국에는 사약을 받았던 박세당, 윤휴 등에게 가해졌던 주홍 글씨나 낙인찍기가 과연 이런 모습과 무엇이 다를까? 왜 우리는 다양성의 범주에서 바라보기가 이토록 힘겹고 고단한 문화를 지녔던 것일까?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필요한 것일까? 교단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다양성을 존중할 수 있는 삶의 가치를 체득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같은 교실에서 다양한 색깔을 가진 학생들이 서로 함께 지내며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사회인이 되어서도 다양한 삶에 대한 이해와 성찰도 가능한 것이 아닐까? 사실은 자사고, 외고의 일반고 전환 문제도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과감하게 단행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과거에는 『환단고기』에 기반한 사이비역사학을 ‘재야사학’이라 일컫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유사역사학’이라는 용어가 제안된 바 있다.”(15쪽)
▶ 용어변천사 : 재야사학(在野史學) → 유사역사학(類似歷史學) → 사이비(似而非)역사학(점점 증오와 혐오의 수준으로 발전되고 있음이 확인됨)

“1974년 7월 25일 재야 역사 단체였던 한국고대사학회(회장 안호상)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국정교과서가 단군을 신화로 규정하여 한국사의 범위를 위축시키고, 일제의 식민지 사관을 그대로 도습한 역사교육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17쪽)

“사이비역사학의 특징은 우리 민족의 우월성에 대한 강조, 광대한 고대 영토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음모론이다. 자신들의 역사상을 뒷받침하는 문헌적, 고고학적 증거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일본인들과 현재 학계의 주류인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은폐되거나 제거되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또한 자신들의 주장을 부정하는 수많은 반증 자료들에 대해서는 일본인이나 ‘식민사학자’들이 날조해 낸 가짜라고 주장하거나 거론 자체를 거부한다.”(26쪽)

“2015년 4월 17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에서는 동북아역사지도 연구책임자인 임기환(서울교대 역사교육)과 이덕일을 출석시켜 문답을 진행하였는데, 그 분위기는 1981년 국회 문공위원회가 주최한 공청회의 반복에 가까웠다. 국회의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사이비역사학의 주장을 대변하는 이덕일 측에 호의적인 태도를 견지하였고, 신문과 방송 등 각종 언론은 동북아역사지도가 중국과 일본의 왜곡된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이덕일 측의 일방적이고 자극적인 주장을 그대로 받아서 보도하였다. 그 결과 수십 명의 역사학자들이 참여하고 8년의 연구 기간과 47억 원의 세금이 투입된 동북아역사지도 편찬 사업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국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 여당은 역사학계의 90%가 좌파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들과 밀착되어 있는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은 현 역사학계가 지나치게 민족주의, 국수주의에 경도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반면 이덕일 등 사이비역사학자들은 역사학계를 시종일관 ‘매국적 친일 식민사학’이라고 매도하고 있다.”(30~31쪽)

“한국 학계에서는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식민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이루어졌다. 그 선봉에 선 연구자들은 이기백, 이용범, 김용섭, 이만열, 조동걸 등이었는데, 여기에는 하타다 다카시(旗田巍)같은 일본인 연구자도 함께하였다. (중략) 만주의 ‘고토’를 회복하지 않는 이상 한국은 강대국이 되기 어렵다는 생각, 혹은 만주를 영유하고 있을 때가 전성기였다는 생각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만주와 함께할 때 온전한 역사가 되고, 그때 강국이 된다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만주와 한반도를 아우른 고구려를 높이 평가함과 아울러, 고구려의 멸망으로 만선일체 의식이 파탄을 맞이하였다고 보며 반도의 역사를 저평가한 만선사 연구자들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47~48쪽)
▶ 다양한 역사문헌이나 기록 등을 토대로 고증과 실증을 통해 역사의 실재를 규명하는 것은 학자의 도리이자 의무일 것이다. 혹시라도 식민사관에 의해 진실이 왜곡된 부분이 있다면 그 실재를 논하는 의미와 가치가 폄하되거나 훼손되어선 안 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이른바 ‘민족의식’의 고취를 목표로 한다는 미명 아래 ‘사이비역사학’의 준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국사 교과서에 대한 사이비역사학계의 개정 요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78년이었다. 이들은 원로 사학자인 이병도, 신석호가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것을 빌미로 이들을 친일파로 매도하는 한편, 이들에 의해 형성된 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반영된 국사 교과서 또한 식민사관에 의해 쓰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국사 교과서의 내용 시정을 건의했다. 이들이 개정을 요구한 주요 내용은 총 8가지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고조선 영역은 동북으로 바다까지, 북으로 헤이룽강(黑龍江)까지, 서남쪽은 베이징까지이다.
2. 단군시대의 1,200년 역사를 삭제하였다.  
3. 단군을 신화로 돌려 부정하고 있다.
4. 연(燕)나라 사람 위만(衛滿)을 고조선의 창건주로 삼았다.
5. 위만조선의 서울인 왕검성은 중국의 산하이관(山海關) 부근에 있었다.
6. 낙랑(樂浪)은 중국의 베이징 지방에 있었다.
7. 백제가 400여 년간 중국의 중남부를 지배했다.
8. 신라 통일 후 68년간의 영토는 지란(吉林)에서 베이징까지였다.

이상 8가지 내용은 주로 『산해경(山海經)』,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와 같은 사료를 원용한 것이다. 이 사료들은 대체로 사료적 가치가 희박하거나, 만주족이 자신들의 역사적 열등성을 감추고자 주변 민족을 자기 민족의 아류로 보기 위해 만든 위작으로서, 신빙성이 거의 없다고 평가되던 것들이었다.”(60~61쪽)
▶ 사료적 가치에 대한 검증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역사학계 내부에서 이와 같은 사료에 대한 검증과 연구가 지속되어야 하지 않는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사료가 아닌 경우에 자료의 사료적 가치가 없다며 폄훼만을 일삼는다면 과연 어떤 진실한 연구와 논의가 가능할까?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도 학계의 격의 없는 연구와 토론을 통해 증명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사이비역사학 측은 ‘영광된 역사’를 주장하는 자신들을 식민주의 사관에 맞서 싸우는 ‘민족사학자’ 혹은 ‘투사’로 이미지화함으로써 대중적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을 포장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민족주의 사학’이라는 포장지는 그 자체로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민족주의 사학은 기본적으로 현실참여 사학이었다. 이들은 학문적 활동 뿐 아니라 행동을 통해 그들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려 하였고, 때문에 역사가의 신념이 강할수록 정당치 못한 방법이라도 바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기도 했다. 우리 역사 속에서 민족주의 사학자로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신채호 역시 이러한 민족주의 사학이 가진 현실 참여적 성격을 내포한 역사가였다. 특히 신채호에게 역사학은 일제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의 하나였으며, 때문에 그는 민족의 위대한 과거를 발굴해냄으로써 이를 통해 동포를 각성시키고 고무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신채호가 표방했던 민족주의 사학의 시각은 그 시대적 배경에서 생각할 때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역사학적 시각을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77~78쪽)
▶ 신채호의 역사학이 철저한 고증 없이 과도한 민족적 시각으로 실재를 왜곡한 부분이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부분이 그런가에 대한 추가 논의와 설득과정이 필요한데, “단군왕검 실존 문제와 이를 통한 단일민족의식의 고취는 극단적 민족주의를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례 외에는 별다른 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 사례조차도 “신화와 역사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논의에서 다뤄야 할 사안이다.

제2부 사이비, 왜 역사학일 수 없는가.

“이덕일은 이것을 분간하지 못한 채 현도군에 붙어 있는 ‘군(郡)’을 고구려에 붙여 읽어, ‘고구려군’이라는 행정구역을 창조한 것이다. 무엇이 역사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에게 이런 초보적 실수를 저지르게 하고, 또 그것을 대중에게 공표해서 망신을 자초하는 지경에 이르게 했을까. 필자에게 타인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능력은 없기 때문에 단정할 수 없지만, 역사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과 태도, 즉 인식은 현재적 관점에 매몰되었고, 해석은 현실적 욕구에 복무하고 있었다는 데 그 원인이 있으리라 생각해본다.(중략) 역사 해석에 대한 이런 태도는 이덕일, 그리고 그와 입장을 공유하는 사이비역사학의 많은 주장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역사 해석을 편협한 동시에 비합리적으로 만드는 일종의 강박이다. 이 강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들의 역사학에서 ‘사이비’라는 꼬리표를 뗄 날은 요원해 보인다.”(138~139쪽)
▶ 이런 서술이 과연 연구자가 취할 수 있는 태도와 발언일까? 이런 문제는 학회에서 상호 검증을 하면 쉽게 관점과 의도가 파악되는 문제이다. 좀 과하다는 느낌이다. 또한 139쪽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네모 박스 ‘고구려’라는 한자의 ‘고’자 바로 왼편에 보면 그보단 작은 글씨로 ‘현도군’이라고 기록됐고, 바로 그 아래 ‘고구려’라는 기록이 나란히 보인다. 그런가 하면 지도 우측 하단에 보면 더 작은 글씨로 ‘현도군(前)’이라는 한자도 보인다. 과거 현도군의 위치였다가 현재 위치로 행정구역 상 변화가 파악된다. 현도군과 동일한 한자 크기로 ‘고구려’가 기록되어 있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런 문제에 대한 이덕일의 설명은 연구자들끼리 학회에서 의사소통하면 금방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 출판물을 통해 이런 식의 인식공격성 내지 명예를 훼손하거나 모욕적인 진술까지 덧보탤 이유가 있을까? 혐오에 가까운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임나일본부’는 교역기관, 외교기관, 안라왜신관, 사신단, 왜계 관료, 중간자적 존재 등 그 성격이 다양하게 추정되고 있다. ‘부(府)’라는 표현을 주목해볼 때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바로 기관, 기구로 파악하거나 사자(使者), 사신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많은 연구에서 ‘임나일본부’를 가야의 대외관계의 산물로 이해하고 있다.”(154쪽)  

“사이비역사가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한반도 일대로 비정하는 것 자체가 곧 과거 일제의 식민사관 논리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논리로 학계를 몰아세우고 있다.”(168쪽)

“낙랑군의 위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이후 새로운 역사의식을 고양시키고 실증적 역사지리 연구를 집대성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특히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백겸, 정약용, 유득공 같은 실학자들은 당시까지 전하는 한국과 중국의 여러 문헌들을 정밀하게 연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한사군에 대한 대부분의 문헌자료들을 수집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우리가 아는 낙랑군 재(在) 평양설, 재(在) 요동설, 재(在) 요서설과 같은 대부분의 학설이 그 당시에 이미 제기되었다.”(169쪽)

“사이비 역사가들은 계속해서 이병도가 낙랑군=평양설을 정통으로 계승한 학자이며, 고대사학계가 그의 학설을 중심으로 한 폐쇄적인 구조 속에서 결론을 내고 있다는 설을 유포하는 실정이니, 이병도의 연구사적 위치가 대중들에게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학계가 아닌 사이비역사가들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체가 사실왜곡이요, 이를 근거로 학계를 ‘매국 세력’이니 ‘식민사학’이니 하며 매도하는 것 자체가 선동이 아니고 무엇인가. 거짓이 진실처럼 둔갑하고, 진실이 거짓에 가려버리는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순수학문인 역사학조차 누군가에겐 일종의 ‘수단’처럼 인식되는 상황은 아닌지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187쪽)

“신화 또한 역사적 사건 혹은 인물에 대한 집단의 기억 보존 방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특히 문자가 없는 시대, 사회일 경우 신화는 집단의 역사 기억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핵심 통로였다.”(227쪽)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단군에 대한 북한 학계의 전통적 견해는 신화적 존재, 전설적 신화의 주인공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93년 평양에서 이른바 ‘단군릉’을 발굴하면서 그와 같은 시각은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앞서 잠깐 언급한 조선시대에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단군묘가 북한이 발굴했다는 단군릉이다. 북한 학계는 현재 그곳에서 나온 유골의 연대 측정을 바탕으로 무덤의 주인공이 반만 년 전에 생존했던 실재한 인물이며, 바로 고조선의 건국시조 단군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54회에 걸친 ‘전자상자성 공명 연대측정’을 통해 유골의 연대가 5011년(±267년) 전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바로 이 인물이 고조선의 건국시조 단군이라는 것이다.”(237쪽)
▶ 탄소측정 등의 방법을 통해 검증이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 연구자들도 북측에 함께 검증을 제안하는 방식 등을 통해 연구 성과가 진실인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채호의 민족주의에서 약간의 변화가 감지된다. 민족주의의 바탕을 이룬 사회진화론적 인식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단재 신채호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오늘날 신채호 추모회가 열리고 해서 가보는데, 우리의 많은 역사가들이 와서 신채호에 대한 높은 추념의 뜻을 나타내는 것은 좋습니다만 신채호가 무정부주의 운동을 했다는 말을 빼버리고 있어서 유감입니다. 내가 보기로는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 운동을 하기 위해 최후를 마친 사람인데, 이런 얘기는 않고 그저 한국의 뛰어난 역사가로만 칭찬한단 말입니다.

위의 회고는 신채호와 함께 활동했던 정화암의 탄식이다. 신채호는 1920년대부터 무정부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했고, 그 와중에 체포되어 결국 옥고를 치른 끝에 숨을 거두었다. 민족주의 수립의 주역이었던 그가 무정부주의 즉 아나키즘을 수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요소들이 작동한 것이겠지만 그중에서도 주된 이유는 사회진화론적 인식의 허상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이호룡의 주장) 사회진화론은 사실상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되었다.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대로라면 강자인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약자인 한국이 식민지배를 받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초에 사회진화론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와 식민주의는 서로 모순되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근대자본주의를 승인한다는 점에서 많은 공유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267~268쪽)
▶ 도무지 무슨 논리인지 이해가 안 된다.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이 뛰어난 역사가로 평가되는데 문제가 되는 걸까? “내가 보기로는~”과 같이 개인적 시각과 관점에 근거해서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위험한 재단이자 낙인찍기는 아닐지?

제3부 젊은 역사학자들, 사이비역사학과 역사 연구를 논하다.

“‘사이비역사학’이라는 표현이 무척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표현이 학문의 다양성이나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처음에 이 용어를 사용할 때도 그런 고민이 많았다. 그럼에도 현 상황은 ‘사이비역사학’이라는 단호한 표현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본질을 드러낼 가장 적확한 용어가 ‘사이비역사학’이라는 결론이다.”(285쪽)
▶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폭력이다. 생산적인 연구자들의 순수한 연구 활동으로 평가하긴 곤란하다. 과거 유학에 관심을 고조시킨 도올 김용옥 교수의 kbs 공중파 심야시간대의 생방송 강의가 연상된다. 당시에도 많은 유학 전공자들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정통에서 어긋난다고. 하지만 그도 역시 전공자였다. 어쩌면 그런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 역사 속에 면면히 존재해 왔기에 박세당과 윤휴 같은 위대한 학자들이 주자와 다른 해석을 시도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약을 받게 되었던 것이 우리 현실이 아닐까? 지금은 어떤가? 교단은 또한 어떤가? 주류 이론이나 교수법 등이 일시적으로 한시적인 각광을 받게 되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그런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벌어질 듯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을까?

“교군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한 뒤 313년 장통(張統)이라는 사람이 모용외에게 투항하면서 천여 가(家)를 데리고 가니까 그들로써 군을 설치했다고 하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록이다. 그들은 이 기록의 모순을 지적했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따르면 낙랑군 인구는 40만 7천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모용외가 데려간 인구수는 많아봐야 7천일 것이다. 그럼 40만 명은 어디 갔냐고 묻는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다. 정말, 40만 명은 어디로 갔을까? 여기엔 한 가지 함정이 숨어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는 서기 2년의 인구 통계인데, 낙랑군과 대방군이 멸망한 건 313년과 314년이다. 너무 먼 시기의 통계인 것이다. 이때와 좀 더 가까운 시기의 통계를 확인해볼까? 『진서(晉書)』 「지리지」에 따르면 낙랑군과 대방군이 인구는 약 8,600여 호였다고 한다. 장통이 데리고 간 천여 가와 8,600여 호의 차이는, 이덕일 등이 주장하는 엄청난 괴리와는 거리가 멀다. 8,600여 호 가운데 천여 가(家)가 도망갔다면 충분히 많이 도망간 것이고, 이들로 군을 설치해 ‘교군’이라 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저들은 『진서(晉書)』 「지리지」의 통계는 이야기하지 않고, 숫자상 괴리가 큰 『한서(漢書)』 「지리지」를 인용하여 반박했던 것이다. 우리가 ‘사이비역사학’을 말할 때 큰 방점을 찍는 것은 기경량도 말했듯이 ‘비(非)’, 즉 ‘아니다’라는 부분이다. ‘비(非)’하지만 ‘사(似)’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덕일이  『진서(晉書)』 「지리지」를 몰랐을까? 그렇지 않다.”(289쪽)

▶ 필자는 ‘가(家)’와 ‘호(戶)’의 개념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당시에는 분명 ‘가(家)’와 ‘호(戶)’의 개념이 명확하게 달랐다. 오늘날 한 가족의 의미는 ‘호(戶)’에 가깝고 혈연과 본관을 함께 하는 친족집단의 큰 묶음의 경우를 ‘가문(家門)’의 개념으로 사용했던 단위가 ‘가(家)’였는데, 이러한 분별을 인식한 상태에 집필을 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 어쨌거나 역사학을 연구한 연구자들이 대중을 위한 역사서술 작업을 소홀히 다뤘던 결과는 연구자들조차도 읽지 않고 있는 논문의 양산과 대중들과 유리된 자신들만의 글 잔치로 전락해버린 오늘날의 세태. 그런 가운데 꾸준한 역사대중화 작업에서 나름의 성취와 공감대를 얻고 있는 연구자의 성과를 ‘사이비’라고 규정짓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역사학을 전공한 전공자의 연구 성과를 사이비라고 단정지어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는 또 무엇일까? 아무리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다지만 상대 연구자의 성과를 모조리 부정하면서까지 ‘사이비’라고 규정짓는 이 문화의 저류에는 어떤 사고들이 작동되는 것일까?
▶ 우리는 얼마만큼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을까? 교단에서 교실에서 지역사회에서 허용되는 다양성은 어느 수준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계속 불편하고 답답했던 부분은 다름 아닌 상대를 연구자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함을 많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불편함은 다양한 차원에서 야기된 듯하다. 가장 큰 것은 기존의 정통과 다른 견해나 관점을 제시했을 때, 이를 대하는 태도가 엄청 폭력적이라는 사실, 게다가 공부를 업으로 삼고 있는 분들이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안타깝다. 충분히 학회에서 토론을 할 수도 있고. 출판물이나 저술 등의 점잖은 방식으로도 치열하게 논쟁을 하면서 서로의 견해차를 좁힐 수도 있을 터인데. 그런 점에서 많이 아쉬웠다.
▶ 선생님들께서는 이 책을 어떻게 읽으셨나요? 함께 나눠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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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7 2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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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범
2008/06/27 2226
371
   [re]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질의지 30209 박재범

임성필
2008/06/28 2436
370
 30329 하정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장점과 미덕

하정곤
2008/06/27 2593
369
 30218 이기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대한 질의지

이기호
2008/06/27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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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 30218 이기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대한 질의지

임성필
2008/06/28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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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530편성현<돼지가 한마리도 죽지 않던 날>작품이 지닌 한계와 비판 서술

편성현
2008/06/27 2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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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328 최덕상 괘지가 한마리도 죽지 않던 날 유사한 작품 비교

최덕상
2008/06/27 2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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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523 이승환 돼지가 한마리도 죽지 않던날 유사작품비교

이승환
2008/06/27 2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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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522 이민규 '돼지가 한마리도 죽지 않던 날'-작품,작가,시대의 관계성

이민규
2008/06/27 2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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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229 조병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오늘날의 삶과 소통되는 점♡

조병관
2008/06/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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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525 장주환 이책에대한비판점과한계

장주환
2008/06/27 2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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