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재 전경원과 함께 고전시가를 통해 여는 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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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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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 섬진 윗마을의 매화
골짜기와 언덕에 수천 그루의 매화가 핀 걸 보면, 아무리 물기가 없는 딱딱한 사람일지라도 매화에 도취되지 않을 수 없다. 기품 있는 꽃과 그 향기의 감흥을 모른다면 노소를 물을 것 없이 그의 인생은 이미 막을 내린 거나 다름이 없다.
강 건너 풍경은 꿈결처럼 아름답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지리산 자락 하동과 구례이고, 남쪽은 백운산 자락 광양 땅이다. 다압 쪽에서 강 건너 북쪽을 바라보면 언덕 위 큰 바위 곁에 올망졸망 붙어 있는 집들이 신선이라도 사는 것처럼 사뭇 환상적이다. 또 화개에서 하동읍으로 내려가면서 바라보이는 강 건너 다압 쪽 섬진 마을은 매화로 꽃구름 속에 묻힌 무릉도원이다. 이 길목에서는 배꽃이 필 무렵에도 안복(眼福)을 누릴 수 있다. 강 건너 풍경은 이렇듯 아름답다. 그러나 막상 강을 건너 그 지점에 가보면, 찌든 삶의 부스러기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우리들의 삶에는 이렇듯 허상과 실상이 겹쳐 있다. 사물을 보되 어느 한쪽이나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꿈은 꿈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이지 깨고 나면 허망하다. 그것이 꿈인 줄 알면 거기에 더 얽매이지 않게 된다. 어느 해 봄이던가 꽃 속에 묻힌 섬진 윗마을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터덕터덕 지나가다가, 산자락에 눈에 띄는 외딴집이 있어 그 오두막에 올라가 보았다. 누가 살다 버리고 갔는지 빈집인데 가재도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였다. 언덕에 차나무가 심어져 있고 동백이 몇 그루 꽃을 떨구고 있었는데, 허물어져 가는 벽 한쪽에 서툰 글씨로 이런 낙서가 있었다. ‘우리 아빠, 엄마는 돈을 벌어서 빨리 자전거를 사주세요? 약속.’ ‘약속’ 끝에다가 하트를 그려 놓았었다. 무심히 이 낙서를 읽고 나니 가슴이 찡했다. 자기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는 걸 보고 몹시 부러워하면서 아이는 자기 아빠와 엄마한테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가난한 그 집 아빠와 엄마는 이 다음에 돈 벌면 사주마고 달랬던 모양이다. 자전거를 갖고 싶어하던 그 집 아이의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나는 궁금하다. 아직도 자전거를 갖지 못했다면 그 집 아이에게 이 봄에 자전거를 사주고 싶다.
- 법정, 『오두막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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