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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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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퇴계 이황의 영정(위)과 고봉 기대승의 편지. 기대승의 영정은 전해지지 않는다.사진제공 소나무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이황 기대승 지음 김영두 옮김/608쪽 2만5000원 소나무

<<“병든 몸이라 문 밖을 나가지 못하다가, 덕분에 어제는 마침내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먼길에 몸조심하십시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퇴계)

1558년 지금의 국립대 총장격인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은 문과에 갓 급제한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1527∼1572)과의 만남을 기뻐하며 이렇게 편지를 썼다.

“멀리서나마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늘 마음속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다행히 선생님을 찾아뵐 수 있었습니다. 삼가 가르침을 가까이에서 받고 보니 깨닫는 것이 많아 황홀하게 심취했고, 그래서 머무르며 모시고 싶었습니다.”(고봉)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 사이의 편지는 1570년 12월,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됐다.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인 옮긴이는 두 사람의 오랜 편지를 모아 현대어로 정성스럽게 풀어놓았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편지는 서로 안부를 전하는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치열한 학문 토론의 장이기도 했다. 강희안의 ‘선비들이 있는 풍경 세가지(士人三景).’사진제공 소나무

“과거에 급제한 뒤 접대하는 일이 자못 괴롭고 번거로운데 병까지 들어서 정신은 혼미하고 몸은 지쳐, 전에 배운 것은 아득하고 새로 배운 것은 거칩니다. 그래서 도학(道學)에 정진하고자 하는 평소의 뜻을 아주 저버리게 될까 매우 두렵고, 옛사람에게 미치기 어려움을 깊이 한탄합니다.”(고봉)

“언제나 빼앗을 수 없는 의지와 꺾을 수 없는 기개와 속일 수 없는 식견을 지녀야 합니다. 그리하여 학문의 힘을 나날이 담금질한 뒤에야 발꿈치가 단단히 땅에 붙어서, 세속의 명예나 이익 그리고 위세에 넘어지지 않기를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퇴계)

남다른 학문적 열정과 치밀한 사고력을 가졌던 고봉은 학문과 입신출세의 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퇴계에게 조언을 구했다. 고봉의 강직한 성품과 재능을 알아보았던 퇴계는 그에게 두 길을 함께 할 것을 강력하게 권했다. 실제로 선조에게 고봉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퇴계였다.

군왕이 내린 관직을 함부로 사양할 수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사직’하는 일이라면 사실상 퇴계가 ‘선수’였다. ‘학문’의 길을 결심한 퇴계 자신은 1549년에 사임장을 올리고 낙향한 뒤, 끊임없이 내려지는 관직에 대해 사망하던 해까지 총 53회의 사직서를 올리며 학문의 길을 지켰다.

“만일 ‘사단(四端)은 이(理)에서 발현되므로 언제나 선하고, 칠정(七情)은 기(氣)에서 발현되므로 선악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와 ‘기’를 나누어 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말뜻에 문제가 있어 후학들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봉)

“저도 사단칠정에 대한 정지운(鄭之雲)의 분별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고 논쟁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선, 즉 ‘순선(純善)’이나 ‘기를 겸한 것(兼氣)’ 등의 말로 고쳤던 것입니다. 그렇게 고친 것은 서로 도와 가며 밝혀 보려는 의욕에서였지, 결코 그 고친 저의 말이 완벽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한 것은 아닙니다.”(퇴계)

조선시대 지식인사회의 최대 논쟁이 된 사단칠정론은 1559년 30대 초반의 청년학도였던 고봉이 대학자로 존경받던 50대 후반의 퇴계에게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둘 사이에만 8년 동안이나 지속된 이 논쟁은 그 후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논쟁을 거쳐 조선 지식인 사회 전반으로 확산됐다. 이는 성리학에서 기본 개념인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바탕으로 인간의 정신 심리작용을 논하는 문제였고 이 논쟁을 통해 조선성리학은 심성론(心性論) 분야에서 중국 성리학을 능가하며 독특한 학풍을 이루게 된다.

“책을 보다가 잘 모르는 것이 있어 별지에 적었습니다. 이것은 지난번 논변에 비할 것은 못되니 답해 주시리라 기대합니다….”(퇴계)

퇴계는 공부하다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26세나 연하인 고봉에게 서슴없이 물었고, 고봉은 또한 열심히 그 문제의 답을 찾았다.

“생각을 다해 자세히 회답할 수 없었으니, 부끄러운 마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몸을 더욱 아끼고 학문의 성취를 게을리 하지 말아, 시대의 소망에 부응하기를 바라면서 삼가 답서를 올립니다.”(퇴계)

1570년 11월 퇴계는 고봉의 학문적 성취를 기원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 다음달에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고봉은 1572년 40대의 젊은 나이에 퇴계의 뒤를 따랐다.

13년의 세월을 담은 편지들을 보면서, 삶의 무게와 생각의 깊이와 묵은 체취까지 느낄 수 있는 ‘편지’의 맛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e메일과 문자메시지의 경박단소(輕薄短小)한 편리함에 너무 익숙해진 시대, 편지를 써 본 지가 참 오래됐다.

동아일보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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