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재 전경원과 함께 고전시가를 통해 여는 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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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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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경, '관저' 장을 통해 보는 시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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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강의(詩經講義)』- 관저(關雎)章에 대하여 -
關 雎
1.
御問曰 竊嘗思之關卽關通之謂 盖言聲音之相通也 夏書關石註訓關爲通 此似可證 石曼卿詩曰 樂意相關禽對語雎鳩之關關 豈非以樂意相關耶.

임금님께서 물으시길,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 관(關)은 바로 관통(關通)이라는 뜻이니 성음(聲音)이 서로 통함을 말한 것이다.『서경』하서(夏書)의 관석(關石)주에서 관(關)의 훈(訓)을 통(通)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증거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석만경(石曼卿)의 시에 이르기를, “즐거운 듯이 새가 마주 보고 지저귀네.[樂意相關禽對語]” 하였는데, 이것이 반드시 자웅이 서로 화답하는 것을 가리킨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새가 마주 대하고 지저귀는 것을 상관이라고 하였으니, 시에서 말한 저구(雎鳩)의 관관은 즐겁게 서로 마주 보고 지저귀는 뜻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1-1.
臣對曰, 禽聲之著于文字 盖多有音無義 鶯聲之栗留 鳩聲之吉匊 只取諧聲 詩之緜蠻 卽此類也 雞之喈喈 鴈之嗈嗈 雎鳩之關關 皆一例也 或曰 雎鳩之聲 如車牽間關之聲 故謂之關關 可備一說.

신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날짐승의 소리가 문자로 드러남은 대개 많은 경우에 소리는 있으나 뜻이 없습니다. 꾀꼬리 소리가 “율류(栗留)”, 비둘기 소리가 “길국(吉匊)”은 다만 어울리는 소리만을 취했습니다. 시의 <면만(緜蠻)>이 곧 이런 부류입니다. 닭이 “개개(喈喈)”, 기러기가 “옹옹(嗈嗈)”, 저구새가 “관관(關關)”등이 모두 하나의 예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저구새의 소리가 마치 수레를 끌 때, 수레 사이의 빗장(關) 소리와 같기 때문에 “관관(關關)”이라고 일컬은 것으로 일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2.
摯而有別 猶言和而不流也 彼爲鷙鳥之說者 引徐鉉所云 鶚鳥交則雙翎 別則立而異處爲證 而鶚鳥之立而異處正以其猛鷙 故有別也 非猛鷙而又能有別也 是可以破鷙鳥之說歟.

‘정이 두터우면서도 분별이 있다’는 것은 ‘화합하면서도 아첨하지 않는다[和而不流]’는 말과 같다. 저 지조(鷙鳥)라는 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서현(徐鉉)이 말한, “악조(鶚鳥)는 사귈 때에는 깃을 서로 포개고, 분별할 때에는 서로 떨어져서 서 있다.”는 말로 증거를 삼고 있는데, 악조가 서로 떨어져서 서있는 것은 바로 맹지(猛鷙)이기 때문에 분별이 있는 것이지 맹지이면서도 분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鷙) 자 아래에 이(而)자를 써서는 안된다. 이것을 가지고 논하면, 지(鷙)자는 ‘심지(深至)’의 지(至)이지 ‘맹지(猛鷙)’의 지(鷙)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와 같이 말한다면 지조(鷙鳥)의 설을 깨트릴 수 있겠는가?

2-1.
臣對曰, 雎鳩之爲鷙鳥 不無可據 爾雅註曰 奎章閣에 所藏된 筆寫本에는 “爾雅註曰”이 아니고, “爾雅曰”이라고 되어있다.
鵰鶚者 정인보가 교감한 판본에는 “鵰鶚者 說文曰”이 아니라 ‘者’가 없이 “鵰鶚 說文曰”로 기록되어 있다.
說文曰白鷢 徐鉉之說又直解 此詩後儒 雜引經傳 以駁鄭樵之說 其說頗詳 然摯與鷙異情 摯而又能有別 誠有味矣 且有別本有二義 一以男位于外 女位于內 不相褻押爲有別 一以各夫其夫各婦 其婦不相混亂爲有別 今集傳兼言之 然雎鳩猛鷙而亦能有一定之配匹 不相混亂 雖不作深摯之意 亦無不可也.

신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저구새가 ‘사나운 새(鷙鳥)’임은 근거를 댈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이아(爾雅)」주에서, ‘독수리(鵰鶚)’라고 한 것이고,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흰매(
白鷢)‘라고 했으니, 서현(徐鉉)의 설명 또한 옳은 해석입니다. 이 시는 후대의 선비들이 어지럽게 경전에서 끌어다가 끌어다가 정초(鄭樵)의 설을 논박한 것인데, 그 설명은 매우 상세합니다. 그러나 ’지(摯)‘와 ’지(鷙)‘는 실정(實情)이 달라서, 사나우면서도 또한 분별이 있을 수 있으니, 참으로 음미할만 합니다. 또 분별이 있다함은 본래 두 가지의 뜻이 있으니, 하나는 남자는 바깥에 자리하는 것이고, 여자는 안에 자리하여, 서로 친압하여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각각의 지아비는, 그 지아비가 한 사람의 지어미만을 취하고, 그 지어미는 서로 섞여 어지러이 굴지 않음이 분별 있음이 되는 것이다. 지금의 집전은 겸하여 말했다. 그러나 저구새가 사납고 억센 날짐승이면서도 한 번 배필이 정해지면 서로 섞여 어지럽게 굴지 않을 수 있음은 비록 깊고 지극한 뜻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또한 불가능할 것은 없습니다.  

3.
女者未嫁之稱太姒 旣配君子之後 猶用未嫁之稱 何也?

숙녀(淑女)는 태사(太姒)를 가리키고, 여(女)란 시집을 가지 않은 여자에 대한 호칭이다. 태사가 이미 군자(君子)의 배필이 된 뒤에도 여전히 시집가지 않은 여자에 대한 호칭을 쓴 것은 어째서인가?

3-1.
臣對曰, 女固未嫁之稱 而如易之家人稱 男正位于外 女正位于內 是旣嫁而猶可用女稱 盖對男而言也.

신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여(女)’란 본디 시집가지 않은 여자의 호칭으로 마치「주역(周易)」에서의 ‘가인(家人)’이라는 호칭과 같아서, 남자는 바깥에서 바르게 자리하고 여자는 안에서 바르게 자리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이미 시집가고서도 ‘여(女)’라는 호칭을 쓸 수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개 ‘남(男)’에 대칭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4.
君子指文王也 或引旱麓之豈弟君子以爲人君之稱 則文王之聘姒氏 是爲世子時也 何得遽以人君之稱 稱之按戴記文王九十七而終 書之無逸曰 文王之享國五十年 則文王四十八 始卽位爲西伯也 文王年十三生 伯邑考其聘姒氏 當是十餘歲時也 古有稱貳君爲君子之文否 未之見也 若以爲文王卽位之後 追叙其婚姻之初 則大旨所謂宮中之人於其始至云者 豈誤耶.

군자(君子)는 문왕(文王)을 가리킨다. 군자라는 것은 부인이 남편을 일컫는 호칭이니, <은기뢰>편(殷其雷篇)의 진진군자(振振君子)와 <여분>편(汝墳篇)의 기견군자(旣見君子)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시는 궁인(宮人)이 지은 것이기는 하지만 태사 입장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문왕을 군자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한록>편(旱麓篇)의 개제군자(豈弟君子)를 인용하면서 이것은 인군을 가리키는 호칭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문왕이 태사와 결혼한 것은 그가 세자(世子)였을 때였다. 그러니 어떻게 대번에 인군에 대한 호칭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대기(戴記)』를 보면 “문왕은 97세에 죽었다.”고 하였고,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에서는 “문왕은 50년 간 왕위에 있었다.”하였으니, 그렇다면 문왕은 48세에야 즉위하여 서백(西伯)이 된 것이다. 그리고 문왕이 13세 때에 백읍고(伯邑考)를 낳았으니, 태사와 결혼한 것은 10여 세 때에 해당된다. 옛날에 과연 세자를 군자라고 일컬은 글이 있었는지 보지 못했다. 만약 문왕이 즉위한 뒤에 전에 혼인하던 때를 돌이켜 서술한 것이라고 한다면, 대지(大旨)에서 말한 “궁중(宮中)에 있는 사람이 그가 처음 이르렀을 때 유한정정(幽閑貞靜)한 덕이 있음을 보고 이 시를 지은 것이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인가?
4-1.
臣對曰, 文王世子云君子曰德則世子亦可稱君子 然此詩若必以爲太姒宮人之作 則義多難通 而 장서각본에는 말이을 ‘而’가 있으나 활자본에는 없다.
文王以王季爲父 年甫十餘 遽自求匹寤寐轉輾非理也 世子雖得賢匹 琴瑟鐘鼓以友以樂非時也 齊魯二家 風刺之說 雖不可述要之 詩人陳說 禮義之詩也 第一章言 唯淑女而後 장서각 판본에는 ‘後’字가 없는데, 활자본에는 ‘後’자가 있어서 ‘而後’로 되어 있다.
可配君子也 第二章言淑女之難得不可以 활자본에는 “不可輕取也”로 ‘以’字가 누락되어 있다.
輕取也 第三章言旣得而和樂也 若以爲太姒始至之初 宮人作之 則義多難 활자본에는 ‘難’이 아니라 ‘離’로 되어있는데 誤記로 보인다.
通 誠如聖問也.

신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문왕(文王)이 세자인데도 군자(君子)라고 이른 것은 말하자면 ‘덕(德)’으로 말한다면 세자도 역시 군자라고 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를 만일 반드시 태사나 궁인의 작품으로 생각한다면 의미는 많은 부분 통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문왕은 왕계를 아버지로 모시고, 나이 10여세에 갑자기 스스로 배필을 구하여 자나깨나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했다는 것인데, 이치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세자가 비록 어진 배우자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금슬종고(琴瑟鐘鼓)’하여 ‘이우이락(以友以樂)’함은 때가 아니다. 제시(齊詩), 노시(魯詩) 이가(二家)의 풍자(諷刺)설은 비록 요점을 서술할 수 없으나 시인은 예(禮)와 의(義)의 시를 베풀어 설명했습니다. 제1장은 오직 숙녀인 뒤에야 군자의 배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고, 제2장은 숙녀를 얻기 어려워도 가벼이 취할 수는 없음을 말한 것이고, 제3장은 이미 얻었기에 화락(和樂)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태사가 처음 이르렀던 초기에 궁인이 지은 것이라면 곧 의미가 거의 통하기 어렵습니다. 진실로 임금님의 물으심과 같습니다.

5.
荇菜先儒多言取其柔順潔淨比后妃之德 而集傳不言者何耶 或左或右言無方也 或寤或寐言無時也 以無方興無時也.

‘행채(荇菜)’에 대해 많은 선유(先儒)들은 그 유순(柔順)하고 정결(潔淨)함을 취하여 후비(后妃)의 덕을 비유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집전(集傳)』에서 말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좌우로 물길 따라 취한다[左右流之]’는 것은 일정한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고 ‘자나깨나 구하도다[寤寐求之]’라는 것은 일정한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일정한 장소가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일정한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음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좌우로 물길 따라 취한다’는 말을 통해 이미 일정한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음을 말하였으니, 또한 숙녀를 구하는 데에 있어 일정한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도 또 한 가지 뜻이니, 이 두 설 가운데 어떤 것을 위주로 해야겠는가?】

5-1.
臣對曰, 荇菜爲祭祀之用 故詩人言之 非必比德也 毛傳曰接余也 或曰菨荼 後儒又以倢伃爲證 以爲后妃之妾 衆女猶荇菜之妾餘草 此皆傅會之說也 左右者輔助也 傳曰婦人無遂事 盖雖自擇而自芼之 無非所以輔助君子 故曰左右采之 左右芼之 謙言之也 且 활자본에는 ‘且’자가 없고, 필사본에는 있다.
若以取之 無方興求之無方 則末章之琴瑟鐘鼓 亦友樂之無方乎 恐非義例也.

신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행채(荇菜)’는 제사를 위해서 쓰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그것을 언급한 것이지, 반드시 ‘덕(德)’에 비유한 것은 아닙니다.「모전(毛傳)」에서는 ‘접여(接余)’라 했고, 혹자는 ‘접도(菨荼)’라고 했습니다. 후대의 선비들은 ‘첩여(倢伃)’를 증거로 삼아서 후비(后妃)의 첩이라고 생각했고, 무리 여성(衆女)은 행채(荇菜)의 첩이 남은 풀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는 모두 억지로 끌어다 붙인 설명입니다.
‘좌우(左右)한다’는 것은 돕고 보조한다는 말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부인이 해야할 일이 없으면, 대개는 비록 스스로 가려 뽑고 스스로 삶아서 올리지만 군자(君子)를 돕고 보조해야할 바 아님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좌우채지(左右采之)’, ‘좌우모지(左右芼之)’를 겸하여 말한 것입니다. 또한 만일 그것을 취하여 일정한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음으로 구하되 장소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을 흥기시킨 것이라면 곧 마지막 장의 ‘금슬종고(琴瑟鐘鼓)’와 또한 ‘우락(右樂)’에도 일정한 장소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옳은 예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6.
芼是蔬茹煮於湆之謂也 芼羹鉶芼之文見於內 則儀禮而語類答魏才仲之問曰 芼是采擇也 與集傳不同何歟?

‘좌우모지(左右芼之)’에 대해 <<집전>>에서는 “삶아서 올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모(芼)라는 것은 채소를 끓는 물에 데치는 것을 이르니, 모갱(芼羹)과 형모(鉶芼)라는 글이 <<예기>> 내칙(內則)과 <<의례>>에 나타난다. 주자가, 삶아서 올리는 것이라고 한 것은 대개 여기에 근본한 것인데, <<주자어류(朱子語類)>> 중에 있는 위재중(魏才仲)의 물음에 답한 글에서는 “모(芼)는 채택(采擇)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집전>>과 서로 같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주자어류>>에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의견이 많이 있으니, 그렇다면 의당 <<집전>>의 것을 바른 해석으로 삼아야 하겠으나 <<주자어류>>에 있는 설도 한 가지 뜻이 될 수가 있겠는가? 만약 모(芼)를 채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장의 수구(首句)에 나오는 좌우채지(左右采之)의 뜻이 채택(采擇)인 것과 말이 중복되어 앞뒤의 차례가 없게 되니, 이것은 따르기 곤란한 듯하지 않은가.

6-1.
臣對曰, 訓芼爲擇 盖毛傳鄭箋文也 據儀禮諸文用菜雜肉汁爲羹曰芼 亦非熟而薦之之意也.

신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모(芼)’의 훈(訓)은 ‘가려뽑음’이 되니 대개「모전」과 「정전」의 글입니다. 「의례(儀禮)」의 여러 글에 근거해 보건대, 나물과 고기 국물을 섞어 사용하여 국을 만든 것을 ‘모(芼)’라고 하니, 또한 ‘삶아서 올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

關雎
(序云哀窈窕思賢才而無傷善之心 ○ 集云 河北方流水之通名 ○ 朱子曰 若爲魯說 則儀禮不得爲周公之書

【서(序)에 이르기를 요조(窈窕)가 현재(賢才)를 사모함이 슬프되 선한 마음을 상하게 함은 없다. ○ 집주에서 이르기를, 하(河)는 북쪽으로 흐르는 물의 일반적 이름이다. ○ 주자가 말하기를, 만일 노시(魯詩)의 설을 따른다면 <의례(儀禮)>는 주공이 지은 책일 수 없다.】

1.
補曰, 序用哀傷二字 以應哀而不傷 一語陋拙極矣 哀而不傷者 卷耳之謂也 春秋傳穆叔如晉 晉侯享之(襄四年) 工歌文王之三 又歌鹿鳴之三 若是者 三篇之詩 並蒙首篇之題 此古人稱詩之法例也 關雎云者 關雎爲首而葛覃卷耳包在其中 關雎樂而不淫 葛覃勤而不怨(延陵季子語) 卷耳哀而不傷 合季子孔子之言而觀之 則其義瞭然 卷耳之詩曰 維以不永懷 維以不永傷 非所謂哀而不傷乎 古者詩樂 必取三篇 故鄕飮燕禮之等 周南則取關雎葛覃卷耳 召南則取鵲巢采蘩采蘋 可按而知也 此本木齋李公之說(李森煥)詳見余西巖講學記

보충해서 말한다. 서(序)에 쓰인 ‘애상(哀傷)’ 두 자(字)는 ‘슬픔에 응하되 상심하지 않는다’ 하니 한마디로 비루하고 졸렬함의 극치이다. ‘애이불상(哀而不傷)’은 <권이(卷耳)>를 이름이다. <춘추전(春秋傳)>에 목숙(穆叔)이 진나라에 가니, 진나라 제후가 그를 대접했는데(양공4년), 악공이 <문왕(文王)>의 삼장(三章)을 노래하고, 또 <녹명(鹿鳴)>의 삼장(三章)을 노래했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세 편의 시가 첫 편의 제목을 나란히 덮어쓴 것이다. 이것이 옛사람들이 시(詩)를 칭하던 법례(法例)였다.
<관저(關雎)>라고 이르는 것은 <관저(關雎)>가 머리편이 되고 <갈담(葛覃)>, <권이(卷耳)>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관저(關雎)>는 ‘즐겁되 음란하지 않고(樂而不淫)’, <갈담(葛覃)>은 ‘부지런하되 원망하지 않고(勤而不怨)’-연릉계자의 말, <권이(卷耳)>는 ‘슬프되 상심하지 않는다(哀而不傷)’라고 하였으니, 계자(季子)와 공자(孔子)의 말을 합쳐서 살펴보면 곧 그 뜻이 명료해진다. <권이(卷耳)>의 시에 이르기를, “오래 그리워하지 않으리라, 오래 상심하지 않으리라(維以不永懷 維以不永傷)”라고 했으니 이른바 ‘애이불상(哀而不傷)’이 아니겠는가!
옛날의 시악(詩樂)은 반드시 세 편을 취했기 때문에 향음(鄕飮)이나 연례(燕禮) 등에서 주남(周南)이라면 <관저(關雎)>, <갈담(葛覃)>, <권이(卷耳)>를 취했고, 소남(召南)이라면 <작소(鵲巢)>, <채번(采蘩)>, <채빈(采蘋)>을 취했음은 살펴서 알 수 있다. 이는 본디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공의 학설이니, 나의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에 상세하게 나온다.  

2.
河者 黃河也 詩凡北方之流水 皆用本名 未有借之爲河者 “有瀰濟盈”, “涇以渭濁”, “瞻彼淇奧”, “瞻彼洛矣” “溱與洧方渙渙猗 “猗”는 “兮”와 같이 어조사이다.『詩經集傳』, 衛風, ‘伐檀’, “猗는 與兮로 同하니 語助辭라”.
”歟 “漆沮”『詩經』小雅, <吉日>
, “灃水”『書經』, 夏書, 禹貢. “弱水旣西. 涇屬渭汭 漆沮旣從. 灃水攸同”.
東注 在洽『詩經』小雅, 祈父之什, ‘正月’.“彼有旨酒 又有嘉殽 洽比其鄰 昏姻孔云 念我獨兮 憂心慇慇.”
之陽 在渭之涘 若是者 衣帶之水 未嘗無名 “誰謂河廣”, “河水洋洋”, “河水淸且漣猗” 在河之漘 在彼中河 若是者 考其疆域 皆指黃河 非他水也 朱子必以爲北方流水之通名者 盖欲以關雎之詩 爲文王宮人之作 而當時文王之居 不在黃河之側 故訓之如是也 竊嘗論之士 生千載之下 遡考先王之典 尋其墜緖 發其秘扃 凡有一字之礙 眼者正宜執之 爲一點孤燈 因之覓一線微徑 此詩之河一字 正是爐中躍金 此詩之非岐豊人所作 不旣明乎

하(河)는 황하(黃河)이다.『시경(詩經)』에서는 일반적으로 북방의 흐르는 물을 모두 본래의 이름을 사용하지만 이름을 빌리지 못한 것은 하(河)가 된 것이니, “미수(瀰水) 건너는 곳에 물이 가득하다(有瀰濟盈)”『詩經』, 邶風, <匏有苦葉>
, “경수(涇水)가 위수(渭水)로 인해 탁해 보이지만(涇以渭濁)”『詩經』, 邶風, <谷風>
, “저 기수(淇水) 벼랑을 보니(瞻彼淇奧)”『詩經』衛風, <淇奧>
, “저 낙수(洛水)를 보니(瞻彼洛矣)”『詩經』小雅, <北山之什>
, “진수(溱水)와 유수(有水)가 봄물이 바야흐로 성하거늘(溱與洧方渙渙猗)”『詩經』鄭風, <溱洧>
, “칠수와 저수의 따름이여(漆沮之從)”『詩經』小雅, <吉日>
, “풍수(灃水)”『書經』, 夏書, 禹貢. “弱水旣西. 涇屬渭汭 漆沮旣從. 灃水攸同”.
는 동쪽으로 흘러들어 흡수(洽水)『詩經』小雅, 祈父之什, <正月>
의 남쪽에 있고, 위수(渭水) 물가에 있다. 이와 같다면 의대(衣帶)의 물(水)은 이름 없었던 적이 없었다.
“누가 하수(河水)가 넓다고 이르렀는가?(誰謂河廣)”『詩經』, 衛風, <河廣>
, “하수(河水)가 넘실넘실 흐르고(河水洋洋)”『詩經』衛風, <碩人>
, “하수(河水)가 맑고 또 물결이 일도다(河水淸且漣猗)”『詩經』衛風, <伐檀>
는 하수(河水) 물가에 있고, 저 가운데 하수(河水)가 있다. 이와 같으면 그 지역을 고찰하건대 모두 황하를 가리키는 것이지 다른 물이 아니다. 주자가 필시 북방으로 흐르는 물의 통명(通名)으로 삼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관저(關雎)> 시를 문왕(文王) 궁인의 작품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문왕의 거처는 황하(黃河) 주변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훈고(訓詁)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내가 일찍이 생각해보니, 그것을 논한 선비들은 천년 뒤에 태어나서 거꾸로 선왕의 전적을 소급하여 고찰함이니, 그 떨어진 단서를 찾아서 감추어진 빗장을 밝히는 것이다. 무릇 한 자(字)의 막힘이 있더라도 안목을 갖춘 자는 진실로 마땅한 그것을 잡으니 한 점 외딴 등불이 되고, 그로 인해 한가닥 미세한 지름길을 찾는 것이다. 이 시(詩)의 ‘하(河)’ 한 글자는 진실로 화로 속에서 반짝이는 금(金)이니, 이 시가 기(岐)땅이나 풍(豊)땅 사람이 지은 작품이 아님은 이미 자명하지 않은가!


3.
張衡<思玄賦>云 “怬河林之蓁蓁 偉關雎之戒女”, 李善注云 “<中山經>曰 北望河林 其狀如蒨”, 鏞案北望河林者 萯山之經也. <呂氏春秋>曰 夏后孔甲田於萯山之下 <竹書紀年>云 帝孔甲 三年王畋于萯山 萯山不遠於夏都也 自其首山至于末山 不過四百四十里 爲河之九都 其間有畛水正回之水 滽滽之水 皆北流注于河南垣縣 謂之伊洛之門 河水自北東逕河陽縣 春秋云 天王狩于河陽 卽此地也 又東逕洛陽縣 始與九都水合 又東過鞏縣 始與洛水相會(已上水經注) 則河林者 正是洛邑之地 張衡 桑欽 郭璞 李善之等 皆古之大儒 明指其地 爲關雎之所作 不可違也 其狀如蒨者 謂草木蓊蔚 故曰 河林蓁蓁也 河洲湥密 艸木蓊蔚 鳥之和鳴 在於此地 與后妃之窈窕相照

장형(張衡;78-139)의 <사현부(思玄賦)>에 이르기를, ‘희(怬)라! 하림(河林)의 울창함이여! 위대하도다! <관저(關雎)>의 여성 가르침이여!“라 했고, 이선(李善)이 주(注)했다고 이르는 <중산경(中山經)>을 이르기를, ’북망하림(北望河林)‘은 그 형상이 마치 ’천(蒨)‘과도 같습니다. 제가 살펴보건댄 ’북망하림‘은 부산(萯山)의 길입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 말하길, ”하후(夏后) 공갑이 부산(萯山) 아래에서 사냥했다.“라 하였고, <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이르길, ”제(帝) 공갑 3년에 왕이 부산(萯山)에서 사냥했다.“라 하였습니다.
부산(萯山)은 하도(夏都)에서 멀지 않아서, 처음 산으로부터 마지막 산에 이르기까지 4백 40리에 불과하여 하(河)의 구도(九都)가 되는데, 그 사이에는 ‘진수(畛水)’, ‘정회지수(正回之水)’, ‘용용지수(滽滽之水)’가 있는데, 모두 북쪽으로 흘러 황하 남쪽 탄현으로 흘러들어갑니다. 그것을 일컬어 이락(伊洛)의 문(門)이라 하여, 하수(河水) 북동쪽으로부터 하양현(河陽縣)에 이르는 길입니다.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천왕께서 ‘하양(河陽)’을 순수하신다”함은 곧 이땅입니다. 또 동쪽으로는 낙양현으로 길이 나서 비로소 구도(九都)의 물과 더불어 합류한다. 또 동쪽으로는 ‘공현(鞏縣)’을 지나서 비로소 낙수(洛水)와 더불어 서로 만나는 것이니(이미 위의 <수경(水經)>에서 주를 달았다.) 곧 ‘하림(河林)’은 진실로 낙읍(洛邑)의 땅입니다. 장형, 상흠, 곽박, 이선 등은 모두 옛날의 큰 학자이셨기에 그 땅을 분명하게 가리킨 것이니, <관저>를 위해 지은 것이 어긋날 수 없음은 그 모습이 마치 ‘천(蒨)’과 같은 것이므로 초목이 울창하다고 일컫습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림(河林)이 울창하다”고 한 것입니다. 하주(河洲)가 빽빽하고 오밀조밀하며 초목이 울창하고 새들은 화답하여 울며 이땅에 있으니, 후비(后妃)의 요조(窈窕)와 더불어 서로 조응하는 것입니다.
  
4.
關雎 필사본에는 ‘관관(關關)’으로 기록되어 있다.
之鳥 不在他水之洲 而在於黃河之洲 則關雎者 河上之人 所能作 而非出於豳岐豊鎬之人者 文王宮人 惡能作之 周召營洛之後 伊洛三河之地 遂爲京輦 君臣上下 往來游衍 而關雎之詩 作於其間 齊魯之說 而可全棄乎 揚雄曰 周康之時 關雎始作 司馬遷曰 周道缺本之袵席 而關雎作(十二諸侯年表)杜欽曰 佩玉晏鳴 關雎歎之(前漢書) 明帝詔曰 應門失守 關雎刺世(後漢書) 范曄史論云 康王晩朝 關雎作諷(皇后記) 朱子於小序之辨 不斥此說 反曰恐有此理均 是朱子之言 何必辨說之棄 而集傳之從乎 孔子盛稱關雎 今乃命之曰刺詩 事體或似未安 此所以尊聖之士 欲守文王之說 雖然關雎則聖人之詩也 康后之失德 何玷於關雎哉 詩人之意 盖云配匹不可以不擇也(杜欽云 詠淑女冀以配上忠孝之篤仁厚之作也) 祭祀不可以不敬也 琴瑟鍾鼓 樂則樂矣 不可繼之以淫也 故託物起興 先用雎鳩 雎鳩者 鷙鳥也 關關者 和鳴也 和而能鷙 樂而有別 非如燕雀鴛鴦之等 暱暱媟媟 有淫褻之意者 河洲深密之地 大河之中 有此小洲 人跡之所不到也 於此乎 和樂貴有恥也 故曰窈窕淑女 君子好逑 窈窕者 深邃也 婦人之義 閨闥欲深 閫閾欲嚴 惟薄欲密 言動欲靜 此窈窕之所以爲淑也 意者康王之時 王與后之行樂 或在光顯之處 故詩人之風喩 如是其志則臣子之忠愛也 其義則乾坤之配合也 其德則和敬之至也 其音則洋洋乎盈耳也 如之何其不可爲三百篇之冠冕乎 宮人者女御也 彼以婦寺之忠 阿諛稱美於新婦 新婦之初而顧乃尊之而爲聖經乎 此朱子所以不棄魯說者也(雎鳩非水鳥學圃有主)

관저(關雎) 새는 다른 강의 물가에 있지 않고, 황하(黃河)의 물가에 있으니 <관저(關雎)>는 황하(黃河) 주변의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것이지, 빈(豳)이나 기(岐)의 풍(豊), 호(鎬) 지역의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데, 문왕의 궁인이 어찌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주소(周召) 영락(營洛)의 후에 이락(伊洛) 삼하(三河)의 땅이 마침내 경연(京輦)이 되고서야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가 서로 왕래교유 했는데, <관저(關雎)>의 시는 그 기간에 지어졌다고 한 제시(齊詩)와 노시(魯詩)의 설명을 모조리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양웅(揚雄)은 이르기를, “주나라 강왕(康王) 때에 <관저(關雎)>가 비로소 지어졌다.”고 하였고, 사마천이 말하기를 “주나라의 도가 이지러짐에 잠자리(袵席)를 근본으로 하여 <관저>를 지었다(12제후연표)”고 하였고, 두흠이 말하기를 “패옥(佩玉)이 아침 늦게 울림에 <관저(關雎)>로 탄식하였다(전한서)”고 하였으며, 명제(明帝)의 조칙에 “응문(應門)이 파수를 잘못하여 <관저(關雎)>로 풍자하였다”고 하였고, 범엽의 사론(史論)에 “강왕(康王)이 조회에 늦게 나오자 <관저>를 지어 풍자하였다.(皇后記)”고 하였다. 주자는「소서변설(小序辨說)」에서 이 설을 배척하지 않고 도리어 “아마도 이런 이치가 있을 법하다.”고 하였다. 모두 주자의 말인데 하필이면「변설(辨說)」의 견해를 버리고「집전(集傳)」의 설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공자께서 <관저>를 성대하게 칭송하였는데 이제 자시(刺詩)라고 이름하면 혹 사체(事體)에 미안한 것 같지만, 이것은 성현을 존숭하는 선비들이 문왕의 설을 고수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관저>는 성인의 시이다. 강후(康后)가 실덕(失德)한 것이 어찌 <관저(關雎)>에 오점이겠습니까?
시인의 뜻은 대개 배필은 가려뽑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른 것입니다. (두흠이 이르기를, “숙녀가 배필을 갈구하되 위로는 충효가 돈독하고 인후(仁厚)함을 일으키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했다.”고 하였습니다.) 제사는 공경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슬종고(琴瑟鐘鼓)’가 즐거우면 즐거운 것입니다만 음란함으로 이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물(事物)에 의탁하여 흥(興)을 일으킴이니 먼저 ‘저구(雎鳩)’를 사용한 것입니다.
‘저구(雎鳩)’는 사나운 새입니다. ‘관관(關關)’은 화합하는 울음입니다. 화합하면서도 사나울 수 있고, 즐거우면서도 분별이 있으니, 제비나 참새, 원왕새의 등속과는 같지 않습니다. ‘닐닐설설(暱暱媟媟)’은 음탕하고 무람한 뜻이 있습니다. ‘하주(河洲)’는  깊고 빽빽한 땅으로 대하(大河)의 가운데에 이 작은 섬이 있는데, 사람의 자취가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
어차호(於此乎)라! 화(和)․낙(樂)․귀(貴)에는 부끄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요조숙녀(窈窕淑女)는 군자의 좋은 짝”이라 한 것입니다. “요조(窈窕)”는 깊고도 깊음(深邃)이니 부인의 거동입니다. ‘규방의 문(규달閨闥)’은 깊게 하고자 함이고, ‘문지방(곤역閫閾)’은 엄히 하고자 함입니다. 다만 ‘박(薄)’은 엄밀하고자 함이니, 말하자면 움직이면서도 고요하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요조(窈窕)’가 ‘숙녀’ 되는 조건입니다. 뜻은 강왕(康王)때에 왕과 후비의 행락(行樂)이 이따금씩 드러난 곳에서도 있었기 때문에 시인이 풍자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 지취(志趣)는 신하와 자식이 충성하고 사랑하는 것이요, 그 의미는 세상에서 배필(配匹)과 합함이요, 그 덕은 온화함과 공경의 지극함이요, 그 소리는 우렁차서 귀에 가득함이니, 그 어떻습니까? 「시경(詩經)」삼백 편의 으뜸되는 것이 불가능하겠습니까? 궁인(宮人)은 여어(女御)입니다.
  

5.
朱子欲從魯詩 從魯則儀禮不得爲周公之書 此朱子所以其難其愼而不敢遽從者也(鄕飮酒鄕射禮燕禮等篇 皆有合樂周南關雎之文) 雖然儀禮 非盡周公之書 士喪禮書於哀公之時(見雜記) 喪服傳成於子夏之手 季文子平日不知聘禮 何必鄕禮燕禮 獨無後聖之修潤哉

주자는 노시(魯詩)를 따르고자 했지만 노시(魯詩)를 따르면「의례(儀禮)」는 주공(周公)이 지은 책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자가 진실로 어려워하고 진실로 삼가서 감히 급작스럽게 따르지 못한 이유입니다. (향음주, 향사례, 연례 등 편에 모두 주남 <관저(關雎)>의 글과 부합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비록 그러하지만 「의례(儀禮)」가 전부 주공이 지은 책은 아니고, <사상례(士喪禮)>는 애공(哀公) 때에 쓰여졌고(「잡기(雜記)」에 기록이 보임), <상복(喪服)>은 전해지다가 자하의 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계문자(季文子)는 평일에 ‘빙례(聘禮)’도 알지 못했는데, 어찌 반드시 향례(鄕禮)와 연례(燕禮)만 유독 후대 성현이 고치고 윤색함이 없었겠습니까?













<관저(關雎)>편을 읽고서(讀關雎篇)

綿綿王業起岐山     면면한 왕업이 기산(岐山)에서 일어나
至于文王德如天     문왕(文王)에 이르러서는 덕(德)이 하늘과도 같구나
天生聖女洽之陽     하늘이 낳으신 성녀(聖女)는 임금의 짝으로 적합하니
窈窕婦德曾無前     요조한 후비의 덕은 일찍이 전에 없었다네
造舟爲梁嬪于周     배를 만들고 들보를 지어 주나라로 향하니  
國人爭詠關雎篇     백성들은 다투어 <관저편(關雎篇)>을 읊조리네
由來夫婦居人倫     예부터 부부가 인륜에 거처함은
陰比乎坤陽比乾     음은 땅에 비유되고, 양은 하늘에 비유되었네
文王旣聖姒又聖     문왕은 이미 성인이시고 태사 또한 성인이시니
同明並德家道全     함께 밝고 나란한 덕이 가도(家道)를 온전히 하네
赫赫盛化流乾坤     혁혁하고 성대한 문화가 천지에 넘쳐 흐르고
汝漢陋俗皆相悛     여(汝)수와 한(漢)수 지역 비루한 풍속을 서로 고쳐서
天下歸心大命集     천하에 귀일하는 마음이 천명으로 운집되어서는
子孫相傳八百年     자손에게 서로 전하여 8백년을 이어왔도다
吾觀興廢由婦人     내 보니, 흥하고 망하는 것은 부인(婦人)으로 말미암으니
妺妲入宮邦國顚     ‘하나라 말희와 은나라 달기’가 입궁했기에 나라가 엎어졌네  
不有懿德徒淫荒     아름다운 덕은 있지 않고 다만 음란하고 황폐해졌으니
明眸皓齒空嬋姸     아름다운 눈동자와 새하얀 치아는 부질없이 고왔구나
如何後王不能承祖武 어찌하여 후대의 왕은 조상의 위업을 잇지 못하고
僞烽一擧兵戎連『河西全集』卷四, 二十-二十一面, ‘讀關雎篇’.
   거짓 봉화가 한 번 오름에 난리만 계속되었는가!



17
 시를 이해한다는 말은... [279]

전경원
2002/12/14 4020
16
 시를 공부하면.... [4]

전경원
2002/12/14 3582
15
 시와 언어, 대화 그리고 일상적 삶의 관계는... [85]

전경원
2002/12/14 3924
14
 '가요(歌謠)'는 '가(歌)'와 '요(謠)'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전경원
2003/08/22 3502
13
 시(詩)는 때(時)를 말(言)하는 것인가? 말(言)의 사원(寺)인가? [146]

전경원
2007/12/15 5022
12
 경연에서 정조의 물음에 대한 유영리의 답변 가운데 일부

전경원
2007/12/15 3693
11
 1. 시는 무엇인가?

전경원
2016/12/14 480
10
 2. 시를 쓰는 이유는?

전경원
2016/12/14 394
9
 3. 시는 어떻게 나오는가?

전경원
2016/12/14 382
8
 4. 시를 창작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전경원
2016/12/14 407
7
 5. 시는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전경원
2016/12/14 417
6
 6. 시와 역사의 기원

전경원
2016/12/14 427
5
 7. 시와 관련된 원전 출처

전경원
2016/12/14 507

 시경, '관저' 장을 통해 보는 시의 본질

전경원
2017/01/04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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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BC371년 출생)와 아리스토텔레스(BC384년 출생)의 시론

전경원
2017/04/28 415
2
 그림서사학과 창의적 글쓰기

전경원
2017/04/28 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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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서사학 1부 소상팔경

전경원
2017/04/28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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