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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겨레어문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의 초고입니다. 논의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수렴하여 보완한 후에 다시 등재할 예정입니다. 지원되지 않는 한자는 화면상에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원문을 보시려면 첨부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시기 바랍니다.

다산(茶山) 정약용의 시경론(詩經論) 및 시의식(詩意識)


- <관저(關雎)>장(章)을 중심으로 -

전경원(건국대강사)


1. 서론


시(詩)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옛날 공자 제자였던 '자공(子貢)'은 가난한 시절 갖은 고생을 하면서 큰 부자가 되었다. 스스로 자신이 지나온 삶을 회고해 보아도 기특하였던지 스승인 공자에게 한마디 칭찬이라도 듣고 싶은 마음에, "선생님! 저는 지난 날 가난했을 때에는 남에게 비굴하게 굴거나 아첨하며 살지 않았고, 부자가 된 지금에는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함이 없는데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라고 묻는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제자가 칭찬 받고 싶어하는 마음임을 알면서도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되새기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랬느냐? 그것도 괜찮기는 하다마는 가난함 속에서도 즐거워할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禮)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라고 대답함으로써 다소 자공의 기대에 어긋나는 답변을 한다. 그러자 자공은 큰 깨달음을 얻고는 다시 공자에게『시경(詩經)』에 등장하는 구절을 인용하여, "선생님께서는 지금 저에게 (현실에 만족하며 안주할 것이 아니라) '절차탁마(切磋琢磨)'를 하라는 말씀이시군요!"라고 하자, 공자는 "이제서야 비로소 자공 너와 함께 시를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라고 했다는 대화 상황이 전한다. 또 공자 제자인 '자하(子夏)'는 공자에게 "방긋 웃는 웃음의 보조개가 예쁘며, 아름다운 눈의 눈동자여! 흰 비단으로써 채색하는구나!"라고 하는 시가 있는데, 무슨 뜻의 시(詩)냐고 묻자 공자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이 마련된 뒤의 일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자하는 "예(禮)가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성품인 忠信보다는) 나중이라는 말씀이시군요!"라고 답한다. 그러자 공자는 "나를 흥기(興起)시키는 제자는 바로 자하로다! 그러니 자하와는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겠도다!"라고 감탄했다. 그런가하면, 공자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어째서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는 흥기(興起)할 수 있고, 득과 실을 관찰할 수 있으며, 조화롭게 무리지을 수 있으며, 성내지 않으면서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부모를 섬기고 멀리로는 임금을 섬길 수 있고,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시(詩)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자신의 아들인 백어(伯魚)에게도『시경(詩經)』에 나오는「주남(周南)」과「소남(召南)」편을 공부했느냐고 물으면서, 사람이면서 주남과 소남편을 공부하지 않으면 그것은 마치 담장을 바르게 하고 마주하며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시(詩) 공부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 선인들에게 시(詩)를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잠시라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소중한 공부였다. 그런 이유로 과거 많은 지식인들은 끊임없이 시(詩)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역시 시(詩)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철저한 자세로 고증(考證)하고 훈고(訓 )했던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다산은 우리에게 철학가이자 사상가로서 더욱 알려져 있기에 문학 분야에서의 조명은 여타의 분야에 비해 비교적 연구가 한산한 편이다. 특히 다산은 정조 임금 당시에 행해졌던『시경강의(詩經講義)』를 통해 그의 시론(詩論)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경론(詩經論)에 대한 연구보다는 그가 남긴 2,487수의 시작품만을 중심으로 연구성과가 일정 정도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시경론(詩經論)에 주목한 논의로는 김흥규와 심경호, 이병찬 등의 연구성과가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김흥규의 논의는 최초이자 본격적으로 다산의『시경강의(詩經講義)』와 일련의 저서에 주목하면서, 시론과 시세계의 관련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다산 시경론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의의가 인정된다. 그러나 연구방향이 통시적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졌기 때문에 우리나라 시경론의 사적 고찰은 가능했지만 다산만의 시경론과 시작품 사이의 관련성을 심도있게 서술하지는 못하고 개략적인 수준에서 머물고 말았다. 심경호의 논의는 다산의 '시경강의'에 주목했다기 보다는 청나라의 '모기령'의 학설과 다산의 학설을 비교하여 그 영향 관계를 규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다산의 시경론과 그의 시세계의 상관성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이병찬의 연구는 최근까지 진행된 우리나라 시경론의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논의에서는 한국 시경론의 사적 개관을 통해서 시경론의 쟁점이 되어 온 '시서설(詩序說)'과 '음시설(淫詩說)'의 문제, 국풍(國風)의 체재(體裁)와 차서론(次序論) 그리고 국풍의 해석과 부비흥(賦比興)의 문제 등을 심도있게 논의했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도 역시 다산의 시경론이 부분적으로 소개되고 있을 뿐, 집중적인 논의는 이루어지 못했고, 아울러 시 작품과의 상관성을 다루지 못했다. 이 외에도 다산의 문학적 성과를 논의한 연구성과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된다.
이 논문에서는 그간 선행연구를 통해 마련된 한국 시경론의 사적 전개 과정을 토대로 하되, 그 가운데에서 다산 정약용의 시경론(詩經論)만이 갖고 있는 시사적 위치와 의의를 고찰하는 동시에 그의 작품세계와 시경론(詩經論)과의 관련성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2. 다산(茶山)의 시경론(詩經論)과 <관저(關雎)>장의 해석
다산 시경론(詩經論)의 핵심은 <관저(關雎)>편의 해설을 통해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주자는 『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관저>를 '후비(后妃)의 덕(德)'을 찬미(讚美)하는 작품으로 해석한 반면에 다산은 <관저(關雎)>를 풍자시로 파악한다. 다산의 견해가 주자와 정면으로 대립되는 지점이다. 이는 시경 전체의 해석에서 첨예한 대립으로 이어지는 '미자설(美刺說)'이 제기된 지점이다. 과연 <관저>편을 찬미시(讚美詩)로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풍자시(諷刺詩)로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그렇다면 다산은 어째서 당대의 보편적이자 타당하다는 견해였던 '미시설(美詩說)'을 인정하지 않고, '풍자설(諷刺說)'을 주장하게 된 것인지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제기된다. 이는 『시경(詩經)』을 포함하여 경학을 인식하는 다산의 관점과 시경 관련 기사의 수용 및 인식 과정을 통해 구체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시경(詩經)을 포함한 경학(經學) 연구에서 일정한 태도와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임금이 "모든 경서(經書)의 목록 중에 십삼경(十三經)이 제일 첫머리에 있다. 십삼경(十三經)은 진실로 도덕(道德)이 담겨있는 풀무요, 문예(文藝)가 실려 있는 깊은 못이요, 큰 바다이다. 그 전수(傳受)의 원류와 전주(箋注)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모두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며 십삼경(十三經)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자 다음과 같이 답을 개진해 올린다.

신은 대답합니다. 신이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건대, 경서(經書)들을 해석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전하여 들은 것으로, 둘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셋째는 자기의 의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사로 해석한 것은 아무리 천백년 뒤에 출생하였어도 천백년 이상의 것을 초월하여 능히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中略... 무릇 한(漢)나라 때의 선비들이 위(魏)·진(晉) 시대의 선비보다 낫고, 위·진 시대의 선비들이 수(隨)·당(唐) 시대의 선비들보다 낫다는 것은, 옛 사람들은 모두 현명하고 지금 사람들은 모두 못나서가 아닙니다. 이는 시대의 원근(遠近)과 사승(師承)의 친소(親疎)의 차이가 서로 상대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거리가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삼경의 원래 뜻을 연구하려면 그 주소(注疏)를 버리고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자가『시경』,『서경』의 집전(集傳)과 『논어』,『맹자』의 집주(集注) 등을 만들 적에 그 의리(義理)의 조리나 도학(道學)의 맥락 등에 있어서는 실로 자신의 의사로써 초월하여 입증하고 주소(注疏)와는 들쭉날쭉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글자의 뜻을 풀이하거나 장구(章句)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전적으로 주소를 인용했습니다. 주자의 뜻은 한 사람이나 한 학파의 말만 가지고 싸워 이겨서 천하의 학문을 변혁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아, 그런데 지금의 학자들은 모두 주자의 칠서대전(七書大全)이 있는 줄만 알지,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춘추(春秋)』와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등의 천지에 빛나는 글도 칠서(七書)의 목록에 배열되지 않았다 해서 그들을 폐기하여 강론하지 않으며, 도외시하여 들여놓지도 않으니, 이는 참으로 유학(儒學)의 큰 걱정거리이며, 세상의 교화에도 시급한 문제입니다. ...이하생략

인용문의 언급과 같이 다산이 경학(經學)을 연구하는 기본 자세는 경전의 근본에 충실함으로써 경전이 지니고 있는 참된 의미에 다가설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 보더라도 위(魏)·진(晉)시대보다는 한(漢)나라 때의 논의가 실상과 부합되는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등의 관점을 통해, 이른 시기에 전해진 기록들이 더욱 신빙성 있음을 제시하면서, 주자가 정리한 '칠서(七書)'에만 집착하는 경학 연구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이는 설득력 있는 견해로서 다산의 경학 연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본 인식에 해당한다. 이처럼 근본에 충실하고자 했던 다산의 경학 연구자세는 송나라 때의 주자가 정리한 『시경집전(詩經集傳)』에 입각해서 논의를 진행하되, 주자의 논리만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자의 논리 가운데도 의문나는 사항이 있으면 다양한 문헌을 널리 참고해서 철저하게 고증하는 과정을 통해 주자가 지녔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학문 자세는 당대의 주자 존숭의 맹목적 태도와는 구별되는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특징이 드러나는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같은 점은 주자의『시경집전(詩經集傳)』을 토대로 분석하되, 많은 부분에서 한(漢)대 삼가시(魯詩, 齊詩, 韓詩) 계열의 논의와 십삼경(十三經) 가운데 시경과 관련된 언급에 더욱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하고 본다면 다산이 반주자학적 견해를 지니고 있다는 시각은 지나치게 도식적 사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주자의『시경집전(詩經集傳)』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진유학에 주목하면서 거시적 안목으로 역대의 시경론 전체를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다산은 맹자의 "왕자(王者)의 자취가 종식됨에 시(詩)가 없어졌으니, 시(詩)가 없어진 뒤에 『춘추(春秋)』가 지어졌다."라는 언급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맹자의 이 언급은 『시경(詩經)』이 지니고 있었던 본래의 기능과 의미가 세태의 변화로 말미암아 자기 고유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공자께서 『시경(詩經)』을 대신해서 『춘추(春秋)』를 지었다는 인식이다. 이같은 언급은 다산의 시경론 형성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맹자의 논리대로라면 『춘추(春秋)』는 '포폄( 貶)'을 생명으로 한다. 그렇다면 시경 역시 '포폄( 貶)'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칭송하고 높일만한 것은 높이는 것이 '포( )'이고, 떨어뜨리고 평가절하 하는 것이 '폄(貶)'이다. 『시경』이 제 기능을 발휘하던 시대에는 '포폄( 貶)'이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공자가『춘추(春秋)』를 지었다는 논리인 셈이다. 이는 당대의 『시경(詩經)』이 지니고 있었던 의미가 오늘날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시경(詩經)』의 개념과는 그 시간적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본질적 의미였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산이 『시경강의(詩經講義)』를 집필하게 된 동기는 그의 나이 48세가 되던 1809년에 작성한 글에서 "건륭 신해년(1791년) 가을 구월에 내원(內苑)에서 활쏘기를 시험했는데, 내가 명중하지 못하여 벌로 북영(北營)에서 숙직하였다. 얼마 후에 정조께서 시경조문 800여장을 내려주시며 나에게 조목조목 대답하되, 40일 이내에 올리도록 하였다. 나는 기한을 20일 더 늘려달라고 빌어서 임금님께 윤허를 받았다. 조문을 완성하여 개진해 올렸더니 임금님의 평이 찬란하게 빛났다. 임금님의 격려가 융성하고 무거웠으며 조문마다 품평해주심이 모두 나의 분수를 지나쳤다." 라고 하면서 지난 일을 회고하며 소개했다. 1809년 기사년에 작성된『시경강의(詩經講義)』원고는 처음 작성한 1791년의 원고 내용을 정리한 후에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조문의 수가 800여장이라 했으나 500장을 조금 넘는 수의 조문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아 1791년 당시 정조가 내린 시경조문은 800여장이었는데, 이를 다산이 다시 첨삭하고 정리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1791년 신해년 겨울에 작성한 『시경강의(詩經講義)』서문(序文)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詩)란 맑게 성음과 용모나 말과 안색 밖에서 읊어야만 그 말의 맥락이 언뜻언뜻 나타나므로, 일문일답(一問一答)하는 기사문(記事文)과 같이 평범하게 그 뜻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글자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구(句)의 뜻이 어두워지고, 한 구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장(章)의 뜻이 어지러워지고, 한 장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편(篇)의 뜻이 이미 서로 멀리 동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소서(小序)가 폐해진 뒤에 한마디 말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훈고(訓 )에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돕는(許與) 자가 적은 사람은 말이 꺽이게 되고, 후원이 많은 자의 말은 사리가 펴지게 되는 것이다. 경서를 해석하는 이가 참으로 선진(先秦)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문자를 널리 고증하여 많고 적은 그 중간을 절충하면 본래의 뜻이 거의 나타날 것이다. 나는 다만 뜻은 있으면서 저술하지 못했다가 신해(辛亥) 가을에 임금께서『시경문(詩經問)』 800여 조목을 친히 지어서 신에게 조목조목 대답하도록 명하였다. 내가 이를 삼가 받아서 읽어보니, 아무리 큰 선비나 대학자라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에 구경(九經)과 사서(四書) 및 고문(古文)과 모든 제자(諸子)와 사서(史書)에서 극히 짧은 말 한마디 글 한 구절이라도 시경(詩經)의 시를 인용하거나 논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차례대로 초록(抄錄)하고 이에서 인용하여 대답하였는데, 대체로 훈고(訓 )가 분명해지자 올바른 뜻에 문제가 없었다. 글을 올리자, 임금은 어필(御筆)로 그 끝에 비평하시기를, "백가(百家)의 말을 두루 인증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학문적 역량(蘊蓄)이 깊고 넓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대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아아!, 내가 어찌 학문의 깊고 넓은 데에 해당될 수 있겠는가. 내가 감히 사사로운 의견으로 성상(聖上)의 분부에 대답하지 못했을 뿐이다.

위의 서문(序文)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다산은 한 글자 한 글자의 정확한 의미를 훈고(訓 )해 내는 것이 작품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 중요한 단서가 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산은 소서(小序)를 불신하게 된 상황을 지적하며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주변에서 긍정하지 않으면 그 말은 기세가 꺽이는 법이고, 후원하는 사람이 많은 말은 사리가 펴지게 마련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돕는 이가 적은 말"이란 '소서(小序)'를 의미하는 것이고, "후원하는 사람이 많은 말"이란『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언급되고 있는 주자의 설명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선진(先秦)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문자를 널리 고증하여" 경서를 해석해야 한다는 일관된 경서 해석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다산은 정조의 물음에 대한 답을 개진하여 올릴 적에는 이같은 방법으로 13경은 물론이고 제자백가와 여러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시경 관련 언급들을 모조리 고증하여 기록하였고, 이를 토대로 답안을 작성할 때는 일단 훈고(訓 )를 통해 글자의 의미가 분명해지자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다산이 경학을 연구하는 관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제는 이러한 다산의 경학 연구 방식이 <관저(關雎)>편의 의미를 규명하는데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하는가 하는 점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겠다. <관저(關雎)>편은 『시경(詩經)』「국풍(國風)」《주남(周南)》의 첫머리에 실려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다음과 같다.
<1>
關關雎鳩 관관(關關)하고 우는 저구(雎鳩)새
在河之洲 하수(河水)의 모래섬에 있도다
窈窕淑女 요조(窈窕)한 숙녀(淑女)
君子好逑 군자(君子)의 좋은 짝이로다.
<2>
參差荇菜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左右流之 좌우로 물길따라 취하도다
窈窕淑女 요조한 숙녀를
寤寐求之 자나깨나 구하도다
求之不得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지라
寤寐思服 자나깨나 생각하고 그리워하니
悠哉悠哉 아득하고 아득해라
輾轉反側 전전하며 반측하노라.
<3>
參差荇菜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左右采之 좌우로 취하여 가리도다
窈窕淑女 요조한 숙녀를
琴瑟友之 거문고와 비파로 친히 하도다
參差荇菜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左右芼之 좌우로 삶아올리도다
窈窕淑女 요조한 숙녀를
鍾鼓樂之 종과 북으로 즐겁게 하도다.

다산이 인식했던 <관저(關雎)>편을 논하기 위해서는 <관저>가 실려있는 '국풍(國風)'의 '풍(風)'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다산은 처음에 정조의 물음에 조문별로 대답을 하였는데, 훗날 다시 시경을 정리할 기회가 생기자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면서『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나의 「시경강의(詩經講義)」12권이 이미 차례가 정해지고 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강의의 체제는 오직 물음에 대답할 뿐이어서 물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종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라도 감히 서술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논한 것은 백에 하나도 거론하지 못해 조금 알고 있는 바를 다 나타낼 수 없었다. 경오년(1810년) 봄에 내가 다산에 있을 때에 학유(學游)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이청이 곁에 있었는데 산은 고요하고 해는 길어서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었다. 때때로 「시경강의(詩經講義)」에서 못다 한 내용을 이청에게 받아쓰게 하였다. 내가 중풍이 들고 몸이 피곤하여 정신이 맑지 않았는데도 이 일을 그치지 않은 것은 선성(先聖)·선왕(先王)의 도에 있는 힘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혹시 잘못되고 망령된 점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나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인용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정조의 조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이미 『시경강의(詩經講義)』가 이루어졌으나 당시의 방식은 임금의 물음에 대해서만 설명을 해야했기 때문에 묻지 않은 것은 감히 답할 수가 없어서 제대로 서술하지 못한 것이 많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다산은 그 정도를 백에 하나도 거론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경강의(詩經講義)』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를 통해 『시경(詩經)』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의 '국풍(國風)' 조(條) 부분을 보면 '풍(風)'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보충해서 말한다. 풍(風)에는 두 가지 뜻이 있고 또한 두 가지 음이 있으니 의미하는 바가 아주 달라서 서로 통할 수가 없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풍으로써 교화하는 것은 풍교(風敎)·풍화(風化)·풍속(風俗)이니 그 음은 평성(平聲)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풍자하는 것은 풍간(風諫)·풍자(風刺)·풍유(風喩)이니 그 음이 거성(去聲)이다. 어떻게 하나의 '풍(風)' 자가 거듭 두 가지의 뜻을 포함하고 두 가지의 음을 지녔는가? 「주역(周易)」에 "풍행지상(風行之上)이 관(觀)이니 선왕이 이 관괘(觀卦)로서 사방을 살피고 백성을 관찰한다."라고 하였고, 「맹자(孟子)」에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풀들이 눕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풍교(風敎)의 퍼져나감으로 국풍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충신에게는 다섯 가지의 간(諫)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내가 그 풍간을 따르리라"고 하였고, 「백호통(白虎通)」에 "그 일을 보고 드러나기 전에 풍(風)으로 고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풍자에 인한 감동으로써 이름을 얻은 것이다. 「시서(詩序)」에서는 두 가지의 뜻을 겸비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주자의「시집전(詩集傳)」에서는 풍자를 제거하고 풍화만 남겨두었다. 그러나 풍자의 뜻을 여기에서 강론할 수가 있다.

다산은 훈고(訓 )와 고증(考證)을 통해 '풍(風)'의 의미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같은 '풍(風)'자 안에도 평성일 경우와 거성일 경우의 차이점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교화하는 '풍교(風敎)', '풍화(風化)', '풍속(風俗)'을 말할 때는 평성(平聲)으로 읽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풍간(風諫)', '풍자(風刺)', '풍유(風諭)'할 때는 거성(去聲)으로 읽힌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용례를 『주역(周易)』과 『맹자(孟子)』, 『공자가어(孔子家語)』등의 문헌을 통해 고증해 내고 있다. 그러면서 본래는 두 가지의 의미가 공존했었으나 주자의 『시집전(詩集傳)』에 이르러 '풍자'의 의미를 제거하고, '풍화'로 남겨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매우 예리한 지적이라고 판단된다. 이 외에도 다산은 시경에서 중요한 개념인 '육의(六義)'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시경의 체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 된다.

(공영달의 소(疏)에 이르기를, "부(賦)·비(比)·흥(興)은 시의 기능이요, 풍(風)·아(雅)·송(頌)은 시의 형식이다."라고 했다.) 보충해서 말한다. 풍·아·송을 일컬어 세 가지 날줄(三經)이라하고 부·비·흥을 세 가지 씨줄(三緯)이라 한다. 내가 보건대, 「주례(周禮)」춘관(春官) <태사(太師)> 본문에 부(賦)·비(比)·흥(興)이 아(雅)·송(頌)보다 앞서 있음은 대개 풍시(風詩)에만 부·비·흥이 있고, 아·송에는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雅)는 모두 바르게 하는 말이고, 송(頌)은 찬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글이 은미(隱微)한 뜻에 힘쓰지 않는데, 어떻게 부·비·흥의 구별이 있겠는가? 풍(風)은 풍간(諷)으로, 더러는 의미를 펴고 베풀어서 스스로 알게 하고(賦), 더러는 물건의 비슷한 것에 견주어서 스스로 알게 하고(比), 더러는 깊고 먼 뜻을 의탁하여 스스로 알게 하니(興), 이것은 모두 풍시(風詩)의 체(體)이다. 그러므로 풍(風)·부(賦)·비(比)·흥(興)은 본래 육의(六義)의 네 부분이나 -「주례」에 이르기를, "태사가 여섯 시를 관장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합쳐져서 풍(風)이 된 것이다. 소아(小雅)에는 비록 비(比)·흥(興)에 가까운 것이 있으나, 그 지취(志趣)는 같지 않다.

인용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풍아송(風雅頌)은 삼경(三經)으로 시의 형식이 되고, 부비흥(賦比興)은 삼위(三緯)로서 시의 표현기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면서, 풍아송(風雅頌)과 부비흥(賦比興)의 차례가 풍(風)·부(賦)·비(比)·흥(興) 그리고 아(雅)·송(頌)의 차례로 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본래는 오직 '풍(風)'에 부(賦)·비(比)·흥(興)이 속해 있는 것이고, 아(雅)와 송(頌)에는 부(賦)·비(比)·흥(興)이 없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 근거로 '아(雅)'는 모두가 바르게 말하는 것이고, '송(頌)'은 오직 '찬미(贊美)'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문장은 '국풍(國風)'의 부비흥(賦比興)과 같이 '은미함(隱微)'에 힘쓰는 글이 아닌데, 어째서 부비흥(賦比興)의 구별이 따로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고 있다. 반면에 '풍(風)'은 '풍자(諷刺)'를 의미하기 때문에 문장의 성격 자체가 직접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은미함'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다산의 논리대로라면 '부비흥(賦比興)'을 통해 '풍시(風詩)'를 구현하게 되는 셈이다.
논의의 초점을 다시 <관저(關雎)> 편에 맞춰보면, 당대에 <관저(關雎)>를 해석했던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하나의 지침으로 삼았던 말은 공자가 논어에서 언급한 <관저>에 대한 평이었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관저(關雎)는 즐거우면서도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상심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던 사실에 주목해서 '낙이불음(樂而不淫)'과 '애이불상(哀而不傷)'을 <관저>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산은 철저한 고증(考證)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낸다.

보충해서 말한다. 서(序)에 쓰인 '애상(哀傷)' 두 자(字)는 '슬픔에 응하되 상심하지 않는다' 하니 한마디로 비루하고 졸렬함의 극치이다. '애이불상(哀而不傷)'은 <권이(卷耳)>를 이름이다. <춘추전(春秋傳)>에 목숙(穆叔)이 진나라에 가니, 진나라 제후가 그를 대접했는데(양공4년), 악공이 <문왕(文王)>의 삼장(三章)을 노래하고, 또 <녹명(鹿鳴)>의 삼장(三章)을 노래했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세 편의 시는 첫 편의 제목을 나란히 덮어쓰는 것이다. 이것이 옛사람들이 시(詩)를 칭하던 법례(法例)였다.
<관저(關雎)>라고 이르는 것은 <관저(關雎)>가 머리편이 되고 <갈담(葛覃)>, <권이(卷耳)>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관저(關雎)>는 '즐겁되 음란하지 않고(樂而不淫)', <갈담(葛覃)>은 '부지런하되 원망하지 않고(勤而不怨)', <권이(卷耳)>는 '슬프되 상심하지 않는다(哀而不傷)'라고 하였으니, 계자(季子)와 공자(孔子)의 말을 합쳐서 살펴보면 곧 그 뜻이 명료해진다. <권이(卷耳)>의 시에 이르기를, "오래 그리워하지 않으리라, 오래 상심하지 않으리라(維以不永懷 維以不永傷)"라고 했으니 이른바 '애이불상(哀而不傷)'이 아니겠는가!
옛날의 시악(詩樂)은 반드시 세 편을 취했기 때문에 향음(鄕飮)이나 연례(燕禮) 등에서 주남(周南)이라면 <관저(關雎)>, <갈담(葛覃)>, <권이(卷耳)>를 취했고, 소남(召南)이라면 <작소(鵲巢)>, <채번(采 )>, <채빈(采 )>을 취했음은 살펴서 알 수 있다. 이는 본디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공의 학설이니, 나의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에 상세하게 나온다.

<관저(關雎)>장에 대한 논의는 다산의 저서인『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도 동일한 관점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관저(關雎)>라고 할 때는 <관저(關雎)>를 포함해서 <갈담(葛覃)>, <권이(卷耳)>까지를 포함한 3장을 말한다. <관저>는 '금슬(琴瑟)'과 '종고(鐘鼓)'로 하되 그 공경함을 잊지 않으니 즐겁되 음란하지 않은 것이고, '척고(陟高)'하고 '승리(乘羸)'하되 오래 상심하지 않음이니, 이것이 바로 '슬프되 상심하지 않는 것이다.(哀而不傷)'이다. 정리해보면, 공자가『논어(論語)』에서 언급한 <관저(關雎)>편에 대한 언급은 <관저>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갈담(葛覃)>과 <권이(卷耳)>를 포함하여 세 작품의 총칭으로 가장 먼저 나오는 작품으로 이름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의미가 명료해진다.
작품 해석과 관련하여 정조가 내린 조문과 이에 다산이 답해 올린 답안을 통해 당대 시경강의(詩經講義)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기에 <관저>편과 관련된 정조 임금의 물음과 다산의 답안을 살펴보겠다.

군자(君子)는 문왕(文王)을 가리킨다. 군자라는 것은 부인이 남편을 일컫는 호칭이니, <은기뢰(殷其雷)>편(篇)의 '진진군자(振振君子)'와 <여분(汝墳)>편(篇)의 '기견군자(旣見君子)'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시는 궁인(宮人)이 지은 것이기는 하지만 태사 입장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문왕(文王)을 군자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한록(旱麓)>편(篇)의 개제군자(豈弟君子)를 인용하면서 이것은 인군을 가리키는 호칭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문왕이 태사와 결혼한 것은 그가 세자(世子)였을 때였다. 그러니 어떻게 대번에 인군에 대한 호칭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대기(戴記)』를 보면 "문왕은 97세에 죽었다."고 하였고,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에서는 "문왕은 50년 간 왕위에 있었다."하였으니, 그렇다면 문왕은 48세에야 즉위하여 서백(西伯)이 된 것이다. 그리고 문왕이 13세 때에 백읍고(伯邑考)를 낳았으니, 태사와 결혼한 것은 10여 세 때에 해당된다. 옛날에 과연 세자를 군자라고 일컬은 글이 있었는지 보지 못했다. 만약 문왕이 즉위한 뒤에 전에 혼인하던 때를 돌이켜 서술한 것이라고 한다면, 대지(大旨)에서 말한 "궁중(宮中)에 있는 사람이 그가 처음 이르렀을 때 유한정정(幽閑貞靜)한 덕이 있음을 보고 이 시를 지은 것이다."고 한 것은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신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문왕(文王)이 세자인데도 군자(君子)라고 이름은 '덕(德)'으로 말한다면 세자도 역시 (德이 있다면) 군자(君子)라고 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를 만일 반드시 태사나 궁인의 작품으로 생각한다면 뜻은 대부분 통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실로 그와 같다면) 문왕은 왕계를 아버지로 모시고, 나이 10여세에 갑자기 스스로 배필을 구하여 자나깨나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했다는 것인데, 이는 이치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세자가 비록 어진 배우자를 얻었다고 할 지라도 '금슬종고(琴瑟鐘鼓)'로 '이우이락(以友以樂)'함은 때에 맞지 않습니다. 제시(齊詩)와 노시(魯詩) 두 계열(二家)의 풍자(諷刺)설은 비록 요점을 서술할 수는 없으나 시인은 예(禮)와 의(義)의 시를 베풀어 설명했습니다. 제1장은 오직 숙녀인 뒤에야 군자의 배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고, 제2장은 숙녀를 얻기 어려워도 가벼이 취할 수는 없음을 말한 것이고, 제3장은 이미 얻었기에 화락(和樂)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태사가 처음 이르렀던 초기에 궁인이 지은 것이라면 곧 의미가 대부분 통하기 어렵습니다. 진실로 임금님께서 하문(下問)하심과 같습니다.

『시경강의(詩經講義)』에서 행해진 정조와 다산의 문답이다. 정조는 '군자(君子)'라는 시어(詩語)에 주목하여 예리한 시각을 보인다. 곧 <관저(關雎)>에 등장하는 '군자(君子)'가 문왕(文王)을 지칭하는 것인데 문왕이 배필을 구한 시점은 세자 때일 것이고, '군자'라는 말은 부인이 남편을 일컫는 경우에 쓰이거나 <한록(旱麓)>편에 사용된 용례에서처럼 인군(人君)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하는데, 문왕이 세자 신분이었는데, 어찌 시인이 문왕에게 '군자(君子)'라는 칭호를 쓸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러면서 문왕이 결혼할 당시의 상황을 토대로 해석 상의 무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산은 '군자(君子)'란 말은 '덕을 이룬 사람의 명칭(德者, 成德之名)'이니, 세자 신분이라도 덕(德)을 갖추었다면 '군자(君子)'라고 칭할 수 있다고 답함으로써 '군자(君子)'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의문을 말끔히 씻어낸다. 그러나 이 작품이 '태사'나 '궁인'의 작품일 수가 없다는 점에서는 정조의 의문과 그 맥을 함께 한다. 이 작품을 문왕의 비인 '태사'나 '궁인'의 작품으로 보기 위해서는 많은 무리가 따름을 지적한다. 인용문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문왕이 지었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다산이 인식한 <관저>편은 제1장에서 오직 정숙한 숙녀라야 군자의 좋은 배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했고, 제2장에서는 정숙한 숙녀를 얻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함부로 아무나 취할 수 없음을 언급한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제3장에서는 배우자를 이미 얻은 상황이므로 화락(和樂)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관저(關雎) 새는 다른 강의 물가에 있지 않고, 황하(黃河)의 물가에 있으니 <관저(關雎)>는 황하(黃河) 주변의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것이지, 빈( )이나 기(岐)의 풍(豊), 호(鎬) 지역의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데, 문왕의 궁인이 어찌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주소(周召) 영락(營洛)의 후에 이락(伊洛) 삼하(三河)의 땅이 마침내 경연(京輦)이 되고서야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가 서로 왕래교유 했는데, <관저(關雎)>의 시는 그 기간에 지어졌다고 한 제시(齊詩)와 노시(魯詩)의 설명을 모조리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양웅(揚雄)은 이르기를, "주나라 강왕(康王) 때에 <관저(關雎)>가 비로소 지어졌다."고 하였고, 사마천이 말하기를 "주나라의 도가 이지러짐에 잠자리( 席)를 근본으로 하여 <관저>를 지었다(12제후년표)"고 하였고, 두흠이 말하기를 "패옥(佩玉)이 아침 늦게 울림에 <관저(關雎)>로 탄식하였다(전한서)"고 하였으며, 명제(明帝)의 조칙에 "응문(應門)이 파수를 잘못하여 <관저(關雎)>로 풍자하였다"고 하였고, 범엽의 사론(史論)에 "강왕(康王)이 조회에 늦게 나오자 <관저>를 지어 풍자하였다.(皇后記)"고 하였습니다. 주자는「소서변설(小序辨說)」에서 이 설을 배척하지 않고 도리어 "아마도 이런 이치가 있을 법하다."고 하였습니다. 모두 주자의 말인데 하필이면「변설(辨說)」의 견해를 버리고「집전(集傳)」의 설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공자께서 <관저>를 성대하게 칭송하였는데 이제 자시(刺詩)라고 이름하면 혹 사체(事體)에 미안한 것 같지만, 이것이 성현을 높이는 인사들이 문왕의 설을 고수하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관저>는 성인의 시입니다. 강후(康后)가 실덕(失德)한 것이 어찌 <관저(關雎)>에 오점이겠습니까?
시인의 뜻은 대개 배필은 가려뽑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른 것입니다. (두흠이 이르기를, "숙녀가 배필을 갈구하되 위로는 충효가 돈독하고 인후(仁厚)함을 일으키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했다."고 하였습니다.) 제사는 공경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슬종고(琴瑟鐘鼓)'는 즐기면 즐거운 것입니다만 음란함으로 이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물(事物)에 의탁하여 흥(興)을 일으킴이니 먼저 '저구(雎鳩)'를 사용한 것입니다.
'저구(雎鳩)'는 사나운 새입니다. '관관(關關)'은 화합하는 울음입니다. 화합하면서도 사나울 수 있고, 즐거우면서도 분별이 있으니, 제비나 참새, 원왕새의 등속과는 같지 않습니다. '닐닐설설(    )'은 음탕하고 무람한 뜻이 있습니다. '하주(河洲)'는 깊고 빽빽한 땅으로 대하(大河)의 가운데에 이 작은 섬이 있는데, 사람의 자취가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 오호라! 화(和)·낙(樂)·귀(貴)에는 부끄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요조숙녀(窈窕淑女)는 군자의 좋은 짝"이라 한 것입니다. "요조(窈窕)"는 깊고도 깊음(深邃)이니 부인의 뜻입니다. '규방의 문(규달閨 )'은 깊게 하고자 함이고, '문지방(곤역  )'은 엄히 하고자 함입니다. 다만 '박(薄)'은 엄밀하고자 함이니, 말하자면, 움직이면서도 고요하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요조(窈窕)'가 '숙녀' 되는 조건입니다. 뜻은 강왕(康王)때에 왕과 후비의 행락(行樂)이 이따금씩 드러난 곳에서도 있었기 때문에 시인이 풍자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 지취(志趣)는 신하와 자식이 충성하고 사랑하는 것이요, 그 의미는 세상에서 배필(配匹)과 합함이요, 그 덕은 온화함과 공경의 지극함이요, 그 소리는 우렁차서 귀에 가득함이니, 그 어떻습니까? 「시경(詩經)」삼백 편의 으뜸되는 것이 불가능하겠습니까? 궁인(宮人)은 여어(女御)입니다. 저 궁녀의 충성(忠誠)스런 마음으로 신부를 아름답다고 일컬으며, 아첨하고 아부하여 신부가 된 초기에 그녀를 높이고서야 성경(聖經)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주자가 노시(魯詩) 학설(學說)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다산은 인용문에서처럼 '관저(關雎)'가 황하(黃河) 물가에 있는 것임을 통해, 문왕(文王) 시대의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양웅, 사마천, 두흠, 범엽, 명제(明帝)의 조칙 심지어 주자의 『소서변설(小序辨說)』등 여러 문헌에서의 고증(考證)을 통해 <관저(關雎)>의 작자가 문왕(文王) 당시의 궁인(宮人)이 아니며, <관저(關雎)> 시는 풍자시(諷刺詩)임을 논증하고 있다. <관저(關雎)>의 작자 문제에 대해서는 주자 자신도 분명한 확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주자는『소설변설(小序辨說)』에서 <관저>를 풍자시로 본 견해에 이치가 있다며 수긍했는데,『시집전(詩集傳)』에서는 '궁인(宮人)'의 작품이라고 상호 모순되는 시각을 드러내놓았다. 다산은 이렇게 주자가 <관저>를 풍자시로 본 노시(魯詩)의 설명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가, 다산의 지적과 같이 <관저>의 작자라고 생각하는 궁인(宮人)들이 태사가 처음에 문왕의 신부로 들어왔을 때, 그녀를 가리켜 칭송하며 아름답다고 아첨하고 아부하는 것이라면, 그같은 내용으로 어떻게 '경전(經典)'에 포함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 제기이다. 이는 타당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결국, 다산은 다양한 문헌을 두루 고증하여 <관저>가 시기적으로는 강왕 때의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고, 풍자의 대상은 밑줄 친 바와 같이 강왕 때에 왕과 후비의 행락(行樂)이 이따금씩 공개된 곳에서도 절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저>를 통하여 은근하게 풍자(諷刺)한 것으로 파악했다. 한편, 조선조의 유학자들의 <관저>에 대한 감상과 해석은 어떠했는가를 알아보고자 자료를 검색했는데 서하(西河) 김인후의 문집에 <관저(關雎)편을 읽고서-原題는 讀關雎>라는 작품이 있어 잠깐 소개해 본다. 김인후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시경의 주석만도 수 천번을 읽었다고 할만큼 시경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사대부였다.

綿綿王業起岐山 면면한 왕업이 기산(岐山)에서 일어나
至于文王德如天 문왕(文王)에 이르러서는 덕(德)이 하늘과도 같구나
天生聖女洽之陽 하늘이 낳으신 성녀(聖女)는 임금의 짝으로 적합하니
窈窕婦德曾無前 요조한 후비의 덕은 일찍이 전에 없었다네
造舟爲梁嬪于周 배를 만들고 들보를 지어 주나라로 향하니
國人爭詠關雎篇 백성들은 다투어 <관저편(關雎篇)>을 읊조리네
由來夫婦居人倫 예부터 부부가 인륜에 거처함은
陰比乎坤陽比乾 음은 땅에 비유되고, 양은 하늘에 비유되었네
文王旣聖 又聖 문왕은 이미 성인이시고 태사 또한 성인이시니
同明 德家道全 함께 밝고 나란한 덕이 가도(家道)를 온전히 하네
赫赫盛化流乾坤 혁혁하고 성대한 문화가 천지에 넘쳐 흐르고
汝漢陋俗皆相悛 여(汝)수와 한(漢)수 지역 비루한 풍속을 서로 고쳐서
天下歸心大命集 천하에 귀일하는 마음이 천명으로 운집되어서는
子孫相傳八百年 자손에게 서로 전하여 8백년을 이어왔도다
吾觀興廢由婦人 내 보니, 흥하고 망하는 것은 부인(婦人)으로 말미암으니
  入宮邦國顚 '하나라 말희와 은나라 달기'가 입궁했기에 나라가 엎어졌네
不有懿德徒淫荒 아름다운 덕은 있지 않고 다만 음란하고 황폐해졌으니
明眸皓齒空嬋姸 아름다운 눈동자와 새하얀 치아는 부질없이 고왔구나
如何後王不能承祖武 어찌하여 후대의 왕은 조상의 위업을 잇지 못하고
僞烽一擧兵戎連 거짓 봉화가 한 번 오름에 난리만 계속되었는가!

이 작품에서도 드러나듯 <관저편(關雎篇)>을 읽은 서하 김인후 역시 문왕(文王)과 후비 태사의 덕(德)을 찬미하는 작품으로 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후반부에 가서는 '말달(  )의 고사를 빌어 후비를 함부로 뽑을 수 없음을 경계하기도 하면서 약간의 자시적(刺詩的) 측면으로 읽히는 면도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다산이 <관저>편 3장을 해석한 내용과 그 맥락이 닿아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다산은 <관저>편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1장은 오직 정숙한 숙녀라야 군자의 배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라고 해석했고, 2장은 숙녀를 얻기 어려워도 가벼이 함부로 취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시의 후반부 역시 이 같은 의미로 읽을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다산의 시경론과 <관저(關雎)>장의 해석에 나타난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산은 시경의 '풍(風)'에는 본래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밝혀내면서, 주자 이후로 '풍자(風刺)'의 의미가 사라지고, '풍교(風敎)'의 의미만 남게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육의(六義)'의 문제에서는 풍(風)·부(賦)·비(比)·흥(興)·아(雅)·송(頌) 의 순서와 갈래의 특징에 주목한 결과, 풍아송(風雅頌)은 시의 형식이고, 부비흥(賦比興)은 '풍(風)'에만 해당되는 개념이고, '아(雅)'와 '송(頌)'에는 해당되지 않는 개념으로 인식하였다. 그 이유는 '아(雅)'와 '송(頌)'의 경우는 그 갈래가 요구하는 갈래의 속성 자체가 부(賦)·비(比)·흥(興)과는 서로 동떨어진 것이기에 '아(雅)'와 '송(頌)'에서는 변별되어 사용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주자(朱子)는 다산과 달리 그것을 구별하여 구분해 놓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자의 자의적인 구분이지 본래의 의미와는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관저>에 대한 해석은 강왕(康王)과 후비(后妃)의 행락(行樂)을 <관저(關雎)>를 통해 은미(隱微)하게 간(諫)한 작품임을 논증하고 있었다. 끝으로 다산은 <경의시(經義詩)>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칠언절구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는 '시경(詩經)'도 물론 다섯 수로 구분되어 포함되어 있다. 다산이 시경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핵심적인 측면이 드러나기에 참고할 수 있게 소개한다.

<1>
古人百計格君心/ 誦工歌被素琴/全把國風兼二雅/直須看作諫書林
(옛사람은 온갖 방법으로 임금 마음을 바로잡아/장님이 외고 악관이 외어 소금에 올렸는데/국풍과 소아 대아까지 모조리 가져다가/곧장 임금 간하는 글로 간주하였네)

<2>
風賦比興都是風/正言體栽不相同/六詩平列無經緯/納五言時未頌功
(풍과 부와 비와 흥이 모두가 풍인데/바른 말 하는 체재가 서로 같지 않더라/육시를 평등하게 열거하여 조리가 없고/오언을 바칠 때는 공을 칭송하지 않도다.)
<3>
鼎 紀惡尙堪憎/于誦于絃豈不懲/樂器未遷詩道喪/春秋袞鉞乃相承
(정이에 악을 기록해 둔 것도 미움직한데/읊고 거문고 타고 함에도 왜 징계하지 않는고/악기는 그대로 있으나 시도가 없어졌기에/춘추의 포폄이 이에 서로 이어졌다오)
<4>
狹邪淫冶本無歌/設有謳 采奈何/虞帝巡方無此法/獻詩誰到太山阿
(화류가의 음란한 풍은 본디 노래도 없지만/설령 노래가 있다 해도 채집하면 무엇하랴/순임금이 지방 순수할 땐 이 법이 없었으니/누가 태산 모퉁이까지 시를 갖다 바치리오)
<5>
小序傳流大小毛/衛宏潤色總摸撈/紫陽劈破眞豪快/垂二千年隻眼高
(소서가 대모 소모에게 전해 내려왔는데/위굉이 윤색한 건 다 더듬어 찾은 거로세/자양이 벽파한 것은 참으로 호쾌하여라/공자 이후 이천 년간에 견식이 가장 높았네)


3. 시의식(詩意識)과 작품 세계의 관련성
앞에서는 다산의 시경론(詩經論)과 <관저(關雎)>장의 해석에 나타난 특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앞장의 논의를 토대로 하되, 다산의 시에 대한 견해라 할 수 있는 시의식(詩意識)과 다산(茶山)의 한시 작품과의 상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릇 문장이라는 것은 어떠한 물건인가 하면, 학식이 속에 쌓여 그 문채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네. 이는 기름진 음식이 창자에 차면 광택이 피부에 드러나고 술이 배에 들어가면 얼굴에 홍조가 도는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들어간다고 이룰 수 있겠는가. 중화(中和)한 덕으로 마음을 기르고 효우(孝友)의 행실로 성(性)을 닦아 공경으로 그것을 지니고 성실로 일관하여 이로써 변하지 않아야 하네. 이렇게 힘쓰고 힘써 도(道)를 바라면서 사서(四書)로 나의 몸을 채우고 육경(六經)으로 나의 지식을 넓히고, 여러 가지 사서(史書)로 고금의 변천에 달통하여 예악형정의 도구와 전장법도의 전고(典故)를 가슴 속 가득히 쌓아놓아야 하네. 그래서 사물(事物)과 서로 만나 시비와 이해에 부딪히게 되면 나의 마음 속에 한결같이 가득 쌓아온 것이 파도가 넘치듯 거세게 소용돌이쳐 세상에 한번 내놓아 천하 만세의 장관으로 남겨보고 싶은 의욕을 막을 수 없게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네. 그리고 이것을 본 사람은 서로들 문장이라고 말할 것이네. 이러한 것을 일러 문장이라 하는 것이네.

위의 인용문은 다산 자신의 문장관(文章觀)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다산은 문장(文章)이라는 것을 삶 속에서 도(道)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것들, 예컨대, 외적으로는 효우(孝友)와 같은 행실로 본성(本性)을 연마하여 공경을 몸에 지니고 성실함으로 일관됨을 유지하는 자세와 더불어 내적으로는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그리고 역사서와 고금의 저서들을 통해 지식을 체득해야 함을 전제 조건으로 삼고 있다. 그런 뒤라면, 특정한 상황이나 경우에 처했을 때, 마음 속에 쌓아놓았던 것이 파도치듯 거세게 소용돌이쳐서 쏟아져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참된 문장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늘어놓음으로써 문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글쓰는 사람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절로 우러나야 참된 문장이라는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음은 다산이 시(詩)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다.

시(詩)라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 근본적으로 낮고 추잡하면 억지로 맑고 고상한 말을 해도 조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뜻이 본디 편협하고 비루하면 억지로 달통한 말을 해도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않게 된다. 시를 배움에 있어 그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걸러내는 것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특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서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이치를 알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나뉨을 살펴서, 찌꺼기를 걸러 맑고 참됨이 발현하게 하면 된다.

다산이 인식하고 있는 시(詩)의 본질을 언급하는 인용문이다. 이처럼 다산의 시의식(詩意識) 역시 앞에서 살펴본 문장관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시(詩)는 뜻을 말하는 것이므로 뜻이 낮거나 추잡하면 조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뜻이 낮거나 비루해지면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못하게 되므로 뜻을 헤아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다음은 다산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인데, 이 글에서 다산은 편지라는 형식을 빌어서 그리고 아들이기에 다른 양식의 글에서보다 더욱 진솔하고 과감하게 자신의 시의식(詩意識)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번에 성수(惺 ) 이학규(李學逵)의 시를 읽어보았다. 그가 너의 시를 논평한 것은 잘못을 잘 지적하였으니 너는 당연히 수긍해야 한다. 그의 자작시 중에는 꽤 좋은 것이 있기는 하더라만 내가 좋아하는 바는 아니더라. 오늘날 시는 마땅히 두보(杜甫)의 시를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모든 시인들의 시 가운데 두보(杜甫)의 시가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시경(詩經)』에 있는 시 300편의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시경』에 있는 모든 시는 충신, 효자, 열녀, 진실한 벗들의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의 발로로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하고 미운 것을 밉다고 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그러한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시를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뜻이 세워져 있지 아니하고, 학문은 설익고, 삶의 대도(大道)를 아직 배우지 못하고, 위정자를 도와 민중에게 혜택을 주려는 마음가짐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시를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니, 너도 그 점에 힘쓰기 바란다. ... 中略...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을 인용한답시고 걸핏하면 중국의 일이나 인용하고 있으니, 이건 또 볼품 없는 것이다. 아무쪼록 『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국조보감(國朝寶鑑)』,『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징비록(懲毖錄)』,『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및 우리나라의 다른 글 속에서 그 사실을 뽑아내고 그 지방을 고찰하여 시에 인용한 뒤에라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나올 것이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이 지은 「16국회고시」는 중국 사람들도 책으로 간행해서 즐겨 읽던 시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사실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동사즐(東史櫛)』은 본디 이럴 때 쓰려고 만들어 놓은 것인데, 지금은 대연(大淵)이가 너에게 빌려줄 턱이 없으니, 우선 중국의 17사(史)에 있는 동이전(東夷傳) 가운데서 이름난 자취를 뽑아놓았다가 사용하면 될 것이다.

인용문과 같이 다산은 두보(杜甫)야말로 『시경(詩經)』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작가로 손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두보의 시 세계가 다산이 지향하고자 했던 시 세계와 가장 잘 부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나라를 사랑하고 시대를 아파하며,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찬미(讚美)할 줄 알아야 하고, 잘못된 것은 풍자(諷刺)할 줄도 알아야 하고,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할 줄 알아야 참다운 시(詩)가 된다는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다산은 용사(用事)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는데, 이는 주목할만한 다산의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다산은 한시 작품에서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는데 대개의 경우가 중국(中國)의 역사를 인용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중국의 고사를 인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서인『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국조보감(國朝寶鑑)』등의 역사서와 우리나라 고유의 문헌을 대상으로 그 속에서의 사실을 통해 인용할 줄 알아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되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는 다산의 "조선시(朝鮮詩)" 선언과도 동일한 맥락에서 언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의 글도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이기 위해 작성한 서신인데, 이 글에서 다산은『시경(詩經)』시의 전형적 형식인 네 자로 된 시(四字詩)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가 인식했던 시의 근본에 관해 언급한다.

시(詩)를 반드시 힘써야 할 것은 아니지만 성정(性情)을 도야(陶冶)하려면 시를 읊는 것도 상당히 도움이 된다. 예스러우면서 힘있고, 기이하면서 우뚝하고, 웅혼하고, 한가하면서 뜻이 심원하고, 맑으면서 환하고 거리낌없이 자유로운 그런 기상에는 전혀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가늘고 미미하고, 자질구레하고 경박하고 다급한 시에만 힘쓰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로다. 단지 율시(律詩)만 짓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루한 습관으로 실제로 다섯 자나 일곱 자로 된 고시(古詩)는 한 수도 보지 못했으니, 그 지취(志趣)의 낮고 얕음과 기질의 짧고 껄끄러움은 반드시 바로잡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내가 요즈음 다시 생각해 보아도 자기의 뜻을 사실적(事實的)으로 표현하는 데나 회포를 읊어내는 데는 넉 자로 된 시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본다. 고시(古詩) 이후의 시인들은 남을 모방하는 것을 혐오하여 마침내 4자로 시짓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요즈음 같은 처지는 4자시 짓기에 아주 좋구나. 너희들도 『시경(詩經)』「풍아(風雅)」의 근본 뜻을 깊이 연구하고 그 후에 도연명(陶淵明)이나 사령운(謝靈運)의 빼어난 점을 본받아 넉자시(四字詩)를 짓도록 하여라. 무릇 시의 근본은 부자(父子)나 군신(君臣)·부부(夫婦)의 떳떳한 도리를 밝히는 데 있으며, 더러는 그 즐거운 뜻을 드러내기도 하고, 더러는 그 원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끌어내게 하는 데 있다. 그 다음으로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서 항상 힘없는 사람을 구원해 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고자 방황하고 안타까워서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는 간절한 뜻을 가진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시가 되는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의 이해(利害)에만 얽매일 것 같으면 그 시는 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은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서신인데, 다산의 시의식(詩意識)이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밑줄 친 부분의 지적과 같이 다산은 자신의 뜻을 사실적(事實的)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네 글자로 된 시만큼 효율적인 형식은 없다고 본다. 그만큼 『시경(詩經)』의 정신을 형식적 측면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다산의 시경론(詩經論)과 시의식(詩意識)을 논의했는데, 이제는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다산의 구체적 작품 세계를 검토해 보겠다. 그런데, 다산이 남긴 한시 작품은 2,500여 수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작품을 남겼다. 이 글에서 다산 시 세계 전모를 살핀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했듯이『시경(詩經)』 정신을 충분히 표현해준다고 언급했던 사언시(四言詩)를 중심으로 간단하게나마 다산 시 세계의 특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산이 남긴 사언시는 총 39수가 전하고 있다.

<1>
采蒿采蒿 / 匪蒿伊莪 / 群行如羊 / 遵彼山坡 / 靑裙   / 紅髮俄兮 / 采蒿何爲 / 涕滂 兮
甁無殘粟 / 野無萌芽 / 唯蒿生之 / 爲毬爲科 / 乾之木  之 /  之 之 / 我 我  / 庶无他兮
쑥을 캐네 쑥을 캐네 / 쑥이 아니라 그저 약초라네 / 무리의 행진이 마치 양떼처럼 / 저 산등성이 넘어가네 / 푸른 치마 혼자 몸 굽이니 / 붉은 머리 기우네! / 쑥은 캐서 무엇하나 / 눈물만 쏟아지네 / 독에는 쌀 한 톨 없는데 / 들에는 움튼 싹조차 없네! / 오직 쑥만 자랐으니 / 둥글고 넓적하게 / 말리고 또 말려서 / 담갔다가 소금에 절여 / 죽 쑤어 먹어야지 / 달리는 살 수 없네

<2>
豺兮狼兮 / 旣取我犢 / 毋 我羊 /  旣無  /  旣無裳 / 甕無餘  / 甁無餘糧 / 錡釜旣奪
匕 旣攘 / 匪盜匪寇 / 何爲不臧 / 殺人者死 / 又誰 兮
승냥이여 이리여! / 이미 우리 송아지 채갔으니 / 우리 양은 물지마라 / 옷상자에는 이미 저고리도 없는데 / 옷걸이에는 이미 치마도 없는데 / 항아리에는 남은 소금도 없고 / 쌀독에는 남은 쌀도 없는데 / 솥과 가마도 벌써 뺏었가고 / 숟가락 젓가락 다 털어갔다네 / 도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니건만 / 어째서 착하질 못한가 / 살인자는 벌써 자살했는데 / 또 누구를 죽이려나?

<3>
有兒雙行 / 一角一羈 / 角者學語 / 羈者 垂 / 失母而號 / 于彼叉  / 執而問故 / 嗚咽言遲 /
曰父旣流 / 母如羈雌 / 甁之旣  / 三日不炊 / 母與我泣 / 涕泗交  / 兒啼索乳 / 乳則枯萎 /
母 我手 / 及此乳兒 / 適彼山村 /  而飼之 /  至水市 / 啖我以飴 /  至道越 / 抱兒如  /
兒旣睡熟 / 我亦如尸 / 旣覺而視 / 母不在斯 / 且言且哭 / 涕泗漣  / 日暮天黑 / 栖鳥群蜚 /
二兒伶  / 無門可  / 哀此下民 / 喪其天  / 伉儷不愛 / 慈母不慈 / 昔我持斧 / 歲在甲寅 /
王眷遺孤 / 毋 殿屎 / 凡在司牧 / 毋敢有違
어떤 아이 둘이서 걸어가는데 / 동생은 쌍상투하고 누이는 묶은 머리를 했네 / 동생은 말을 배울 나이고 / 누이는 다박머리 드리웠네 / 어미를 잃고 우는 / 저 두 갈래 길에서 / 붙잡고서 연유를 물으니 / 흐느껴 울며 말을 못하네 / 말하길 아빠는 오래 전에 집을 떠났고 / 어머니는 짝을 잃었어요 / 쌀독은 벌써 비었기 때문에 / 사흘을 굶었어요 / 엄마가 나를 안고 흐느껴 울며 / 눈물 콧물 두 뺨에 얼룩졌어요 / 동생은 울면서 젖을 찾았지만 / 젖은 말라서 붙어버렸어요 / 엄마는 내손 잡고 / 이 젖먹이를 업고서 / 저 산골을 가서는 / 구걸해서 먹였어요. / 어시장에 이르러서는 / 제게 엿도 먹여줬어요 / 이 길까지 데리고 와서는 / 동생을 사슴 새끼 품듯 안고 잤어요 / 동생은 세상 모른 채 잠이 들었고 / 저 역시 죽은 사람처럼 잠들었지요 / 깨고 나서 보았지만 엄마는 여기 없었어요 / 말하다가 울다가 / 눈물 콧물 줄줄 흐르네 / 날 저물어 어두워지면 / 새들도 집을 찾는데 / 외로운 두 오누이 / 찾아갈 집이 없구나 / 슬프도다 이 백성들 / 그 하늘의 떳떳함마저 잃었구나! / 지아비와 지어미가 사랑하지 못하고 / 엄마도 제 자식 돌보지 않는구나 / 갑인년에 이 몸이 / 암행어사 되었을 때, / 임금님 분부하셨지 고아를 보살펴서 / 고생 없게 하라고 / 벼슬하는 사람들아 / 이 말 감히 어기지 마시오.

위의 세 작품을 보면 다산(茶山)이 추구했던 시 세계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하는 점을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인용문의 언급과 같이 다산(茶山)은『시경(詩經)』의 주요 형식인 사언시(四言詩)를 가지고 『시경(詩經)』의 시정신을 구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이 남긴 2,500여수 가운데 서너 작품의 시만을 대상으로 다산 시의 특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시경론과 시의식을 토대로 살펴보았을 때, 다산의 한시 작품이 지닌 미의식(美意識)은 현실 비판적 요소가 강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풍자적이면서도 기법면에서는 사실주의적 측면이 매우 강하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미의식은 다산의 언급처럼 부단한 자기수양과 성실한 공부를 통해 한 시대를 관통할 수 있는 예리한 통찰력과 나라를 걱정하고 시대를 고민할 수 있는 현실 인식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이같은 점은 다산의 시경론에서도 강조되었던 것처럼 시의식과 실제 그의 시세계에서도 동일한 지향을 보이고 있었다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4. 결론

* 결론은 토론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사항들을 수렴하여 반영한 후에 다시 작성할 예정입니다.

*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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