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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사언시(四言詩)와 시경론(詩經論) 및 시인식(詩認識)의 상관성

전경원(건국대)

국문초록

다산 정약용은 전라남도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통해 학문적 온축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유배라는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수많은 경전들을 연구하며 유배의 의미를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행복을 누린 학자라는 역설적 표현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경강의(詩經講義)는 그 결과물의 하나였다. 그는 시경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한시(漢詩)의 형식 가운데 사언시(四言詩)를 선택하여 총16수를 창작했다. 다산은 이를 통해 시경의 시(詩) 정신을 구현하고, 시경에 대한 의미와 해석의 논란을 해소해 보고자 했다. 그런 점에 주목하여 이 논문에서는 사언시(四言詩)를 통해 다산이 말하고 싶었던 바가 무엇이었나 하는 점을 밝히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다. 그 결과 다산은 사언시(四言詩)를 통해 풍자(諷刺)와 찬미(讚美)뿐만 아니라 시대를 근심하고 민중의 고달픈 삶을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이러한 사언시(四言詩)를 통한 시적 형상화 방식이『시경(詩經)』이 지니고 있었던 본원적인 의미와 기능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언시(四言詩)라는 형식을 통해 시경이 지니고 있었던 본래 의미를 되살려보고자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산이 남긴 작품의 분량을 고려할 때, 사언시(四言詩)는 많은 양을 차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아울러 시(詩)의 본원적 의미와 기능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과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주제어 : 사언시(四言詩), 시경론(詩經論), 시 인식(詩認識), 시경강의(詩經講義), 풍자(諷刺), 찬미(讚美), 시경(詩經), 본원적 의미와 기능

1. 서론

다산 정약용은 『시경(詩經)』이 본래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었으며 당대에 어떤 기능을 담당했을까? 하는 의문을 가장 진지하게 했고, 가장 철저하게 연구했던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詩)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옛날 공자 제자였던 ‘자공(子貢)’은 가난한 시절 갖은 고생을 하면서 큰 부자가 되었다.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자신이 지나온 삶이 기특하였던가보다. 스승인 공자에게 한마디 칭찬이라도 듣고 싶은 마음에, “선생님! 저는 지난 날 가난했을 때에는 남에게 비굴하게 굴거나 아첨하며 살지 않았고, 부자가 된 지금에는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함이 없는데 이 정도면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제자가 칭찬 받고 싶어 하는 마음임을 알았다. 하지만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되새기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랬느냐? 그것도 괜찮기는 하다마는 가난함 속에서도 즐거워할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禮)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라고 대답한다. 다소 자공의 기대에 어긋나는 답변이었다. 그러자 자공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자공이 다시 공자에게『시경(詩經)』에 등장하는 구절을 인용하여, “선생님께서는 지금 저에게 현실에 만족하며 안주할 것이 아니라 ‘절차탁마(切磋琢磨)’를 하라는 말씀이시군요!”라고 하자, 공자는 “이제야 비로소 자공 너와 함께 시를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라고 했다는 대화가 전한다.
또 공자 제자인 ‘자하(子夏)’는 공자에게 “방긋 웃는 웃음의 보조개가 예쁘며, 아름다운 눈의 눈동자여! 흰 비단으로써 채색하는구나!”라고 하는 시가 있는데, 무슨 뜻의 시(詩)냐고 묻자 공자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비단이 마련된 뒤의 일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자하는 “예(禮)가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 성품인 忠信보다는) 나중이라는 말씀이시군요!”라고 답한다. 그러자 공자는 “나를 흥기(興起)시키는 제자는 바로 자하로다! 그러니 자하와는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겠도다!”라고 감탄했다. 그런가하면, 공자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어째서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는 흥기(興起)할 수 있고, 득과 실을 관찰할 수 있으며, 조화롭게 무리지을 수 있으며, 성내지 않으면서 원망할 수 있으며, 가까이는 부모를 섬기고 멀리로는 임금을 섬길 수 있고,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시(詩)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자신의 아들인 백어(伯魚)에게도『시경(詩經)』에 나오는「주남(周南)」과「소남(召南)」편을 공부했느냐고 물으면서, 사람이면서 주남과 소남편을 공부하지 않으면 그것은 마치 담장을 바르게 하고 마주하며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시(詩) 공부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 선인들에게 시(詩)를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잠시라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소중한 공부였다. 그런 이유로 과거 많은 지식인들은 끊임없이 시(詩)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역시 시(詩)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철저한 자세로 고증(考證)하고 훈고(訓?)했던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다산은 우리에게 철학가이자 사상가로서 더욱 알려져 있기에 문학 분야에서의 조명은 여타의 분야에 비해 비교적 연구가 한산한 편이다. 특히 다산은 정조 임금 당시에 행해졌던『시경강의(詩經講義)』를 통해 그의 시론(詩論)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경론(詩經論)에 대한 연구보다는 그가 남긴 2,487수의 시작품만을 중심으로 연구 성과가 일정 정도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시경론(詩經論)에 주목한 논의로는 김흥규와 심경호, 이병찬 등의 연구 성과가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김흥규의 논의는 최초이자 본격적으로 다산의『시경강의(詩經講義)』와 일련의 저서에 주목하면서, 시론과 시세계의 관련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다산 시경론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의의가 인정된다. 그러나 연구방향이 통시적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졌기 때문에 우리나라 시경론의 사적 고찰은 가능했지만 다산만의 시경론과 시작품 사이의 관련성을 심도 있게 서술하지는 못하고 개략적인 수준에서 머물고 말았다. 심경호의 논의는 다산의 ‘시경강의’에 주목했다기 보다는 청나라의 ‘모기령’의 학설과 다산의 학설을 비교하여 그 영향 관계를 규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다산의 시경론과 그의 시세계의 상관성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이병찬의 연구는 최근까지 진행된 우리나라 시경론의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논의에서는 한국 시경론의 사적 개관을 통해서 시경론의 쟁점이 되어 온 ‘시서설(詩序說)’과 ‘음시설(淫詩說)’의 문제, 국풍(國風)의 체재(體裁)와 차서론(次序論) 그리고 국풍의 해석과 부비흥(賦比興)의 문제 등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도 역시 다산의 시경론이 부분적으로 소개되고 있을 뿐, 집중적인 논의는 이루어지 못했고, 아울러 사언시(四言詩) 작품과의 상관성을 다루지 못했다. 이 외에도 다산의 문학적 성과를 논의한 연구 성과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된다.
이 논문에서는 그간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다산 정약용의 사언시(四言詩)만이 지니고 있는 시사적 위치와 의의를 고찰하는 동시에 사언시(四言詩)와 시경론(詩經論)의 관련성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2. 시경강의(詩經講義) 및 시 인식(詩認識)을 통해 드러나는 시론

다산 시경론(詩經論)의 핵심은 <관저(關雎)>편의 해설을 통해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주자는 『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관저>를 후비(后妃)의 덕(德)을 ‘찬미(讚美)’하는 작품으로 해석한 반면에 다산은 <관저(關雎)>를 ‘풍자(諷刺)’하는 시로 파악한다. 다산의 견해가 주자와 정면으로 대립되는 지점이다. 이는 시경 전체의 해석에서 첨예한 대립으로 이어지는 ‘미자설(美刺說)’이 제기된 지점이다. 과연 <관저>편을 찬미시(讚美詩)로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풍자시(諷刺詩)로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그렇다면 다산은 어째서 당대의 보편적이자 타당하다는 견해였던 ‘미시설(美詩說)’을 인정하지 않고, ‘풍자설(諷刺說)’을 주장하게 된 것인지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제기된다. 이는 『시경(詩經)』을 포함하여 경학(經學)을 인식하는 다산의 관점과 시경 관련 기사의 수용 및 인식 과정을 통해 구체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시경(詩經)을 포함한 경학(經學) 연구에서 일정한 태도와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임금이 “모든 경서(經書)의 목록 중에 십삼경(十三經)이 제일 첫머리에 있다. 십삼경(十三經)은 진실로 도덕(道德)이 담겨있는 풀무요, 문예(文藝)가 실려 있는 깊은 못이요, 큰 바다이다. 그 전수(傳受)의 원류와 전주(箋注)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모두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며 십삼경(十三經)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자 다음과 같이 답을 개진해 올린다.

신은 대답합니다. 신이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건대, 경서(經書)들을 해석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전하여 들은 것으로, 둘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셋째는 자기의 의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사로 해석한 것은 아무리 천백년 뒤에 출생하였어도 천백년 이상의 것을 초월하여 능히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中略... 무릇 한(漢)나라 때의 선비들이 위(魏)?진(晉) 시대의 선비보다 낫고, 위?진 시대의 선비들이 수(隨)?당(唐) 시대의 선비들보다 낫다는 것은, 옛 사람들은 모두 현명하고 지금 사람들은 모두 못나서가 아닙니다. 이는 시대의 원근(遠近)과 사승(師承)의 친소(親疎)의 차이가 서로 상대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거리가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삼경의 원래 뜻을 연구하려면 그 주소(注疏)를 버리고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자가『시경』,『서경』의 집전(集傳)과 『논어』,『맹자』의 집주(集注) 등을 만들 적에 그 의리(義理)의 조리나 도학(道學)의 맥락 등에 있어서는 실로 자신의 의사로써 초월하여 입증하고 주소(注疏)와는 들쭉날쭉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글자의 뜻을 풀이하거나 장구(章句)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전적으로 주소를 인용했습니다. 주자의 뜻은 한 사람이나 한 학파의 말만 가지고 싸워 이겨서 천하의 학문을 변혁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아, 그런데 지금의 학자들은 모두 주자의 칠서대전(七書大全)이 있는 줄만 알지,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춘추(春秋)』와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등의 천지에 빛나는 글도 칠서(七書)의 목록에 배열되지 않았다 해서 그들을 폐기하여 강론하지 않으며, 도외시하여 들여놓지도 않으니, 이는 참으로 유학(儒學)의 큰 걱정거리이며, 세상의 교화에도 시급한 문제입니다. ...이하생략

인용문의 언급과 같이 다산이 경학(經學)을 연구하는 기본자세는 경전의 근본에 충실함으로써 경전이 지니고 있는 참된 의미에 다가설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 보더라도 위(魏)?진(晉)시대보다는 한(漢)나라 때의 논의가 실상과 부합되는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등의 관점을 통해, 이른 시기에 전해진 기록들이 더욱 신빙성 있음을 제시하였다.
주자가 정리한 ‘칠서(七書)’에만 집착하는 당대의 경학 연구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이는 설득력 있는 견해로서 다산의 경학 연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본 인식에 해당한다. 이처럼 근본에 충실하고자 했던 다산의 경학 연구자세는 송나라 때의 주자가 정리한 『시경집전(詩經集傳)』에 입각해서 논의를 진행하되, 주자의 논리만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주자의 논리 가운데도 의문 나는 사항이 있으면 다양한 문헌을 널리 참고해서 철저하게 고증하는 과정을 통해 주자가 지녔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학문 자세는 당대의 주자 존숭의 맹목적 태도와는 구별되는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특징이 드러나는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 같은 점은 주자의『시경집전(詩經集傳)』을 토대로 분석하되, 많은 부분에서 한(漢)대 삼가 시(魯詩, 齊詩, 韓詩) 계열의 논의와 십삼경(十三經) 가운데 시경과 관련된 언급에 더욱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하고 본다면 다산이 반주자학적 견해를 지니고 있다는 시각은 지나치게 도식적 사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주자의『시경집전(詩經集傳)』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진유학에 주목하면서 거시적 안목으로 역대의 시경론 전체를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다산은 맹자의 “왕자(王者)의 자취가 종식됨에 시(詩)가 없어졌으니, 시(詩)가 없어진 뒤에 『춘추(春秋)』가 지어졌다.”라는 언급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맹자의 이 언급은 『시경(詩經)』이 지니고 있었던 본래의 기능과 의미가 세태의 변화로 말미암아 자기 고유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공자께서 『시경(詩經)』을 대신해서 『춘추(春秋)』를 지었다는 인식이다. 이와 같은 언급은 다산의 시경론 형성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맹자의 논리대로라면 『춘추(春秋)』는 ‘포폄(?貶)’을 생명으로 한다. 그렇다면 시경 역시 ‘포폄(?貶)’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칭송하고 높일만한 것은 높이는 것이 ‘포(?)’이고, 떨어뜨리고 평가절하 하는 것이 ‘폄(貶)’이다. 『시경』이 제 기능을 발휘하던 시대에는 ‘포폄(?貶)’이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공자가『춘추(春秋)』를 지었다는 논리인 셈이다. 이는 당대의 『시경(詩經)』이 지니고 있었던 의미가 오늘날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시경(詩經)』의 개념과는 그 시간적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본질적 의미였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산이 『시경강의(詩經講義)』를 집필하게 된 동기는 그의 나이 48세가 되던 1809년에 작성한 글에서, “건륭 신해년(1791년) 가을 구월에 내원(內苑)에서 활쏘기를 시험했는데, 내가 명중하지 못하여 벌로 북영(北營)에서 숙직하였다. 얼마 후에 정조께서 시경조문 800여장을 내려주시며 나에게 조목조목 대답하되, 40일 이내에 올리도록 하였다. 나는 기한을 20일 더 늘려달라고 빌어서 임금님께 윤허를 받았다. 조문을 완성하여 개진해 올렸더니 임금님의 평이 찬란하게 빛났다. 임금님의 격려가 융성하고 무거웠으며 조문마다 품평해주심이 모두 나의 분수를 지나쳤다.” 라고 하면서 지난 일을 회고하며 소개했다. 1809년 기사년에 작성된『시경강의(詩經講義)』원고는 처음 작성한 1791년의 원고 내용을 정리한 후에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조문의 수가 800여장이라 했으나 500장을 조금 넘는 수의 조문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아 1791년 당시 정조가 내린 시경조문은 800여장이었는데, 이를 다산이 다시 첨삭하고 정리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1791년 신해년 겨울에 작성한 『시경강의(詩經講義)』서문(序文)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詩)란 맑게 성음과 용모나 말과 안색 밖에서 읊어야만 그 말의 맥락이 언뜻언뜻 나타나므로, 일문일답(一問一答)하는 기사문(記事文)과 같이 평범하게 그 뜻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글자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구(句)의 뜻이 어두워지고, 한 구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장(章)의 뜻이 어지러워지고, 한 장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편(篇)의 뜻이 이미 서로 멀리 동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소서(小序)가 폐해진 뒤에 한마디 말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훈고(訓?)에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돕는(許與) 자가 적은 사람은 말이 꺽이게 되고, 후원이 많은 자의 말은 사리가 펴지게 되는 것이다. 경서를 해석하는 이가 참으로 선진(先秦)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문자를 널리 고증하여 많고 적은 그 중간을 절충하면 본래의 뜻이 거의 나타날 것이다. 나는 다만 뜻은 있으면서 저술하지 못했다가 신해(辛亥) 가을에 임금께서『시경문(詩經問)』 800여 조목을 친히 지어서 신에게 조목조목 대답하도록 명하였다. 내가 이를 삼가 받아서 읽어보니, 아무리 큰 선비나 대학자라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에 구경(九經)과 사서(四書) 및 고문(古文)과 모든 제자(諸子)와 사서(史書)에서 극히 짧은 말 한마디 글 한 구절이라도 시경(詩經)의 시를 인용하거나 논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차례대로 초록(抄錄)하고 이에서 인용하여 대답하였는데, 대체로 훈고(訓?)가 분명해지자 올바른 뜻에 문제가 없었다. 글을 올리자, 임금은 어필(御筆)로 그 끝에 비평하시기를, “백가(百家)의 말을 두루 인증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학문적 역량(蘊蓄)이 깊고 넓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대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아아!, 내가 어찌 학문의 깊고 넓은 데에 해당될 수 있겠는가. 내가 감히 사사로운 의견으로 성상(聖上)의 분부에 대답하지 못했을 뿐이다.

위의 서문(序文)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다산은 한 글자 한 글자의 정확한 의미를 훈고(訓?)해 내는 것이 작품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 중요한 단서가 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산은 소서(小序)를 불신하게 된 상황을 지적하며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주변에서 긍정하지 않으면 그 말은 기세가 꺽이는 법이고, 후원하는 사람이 많은 말은 사리가 펴지게 마련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돕는 이가 적은 말”이란 ‘소서(小序)’를 의미하는 것이고, “후원하는 사람이 많은 말”이란『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언급되고 있는 주자의 설명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선진(先秦)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문자를 널리 고증하여” 경서를 해석해야 한다는 일관된 경서 해석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다산은 정조의 물음에 대한 답을 개진하여 올릴 적에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13경은 물론이고 제자백가와 여러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시경 관련 언급들을 모조리 고증하여 기록하였고, 이를 토대로 답안을 작성할 때는 일단 훈고(訓?)를 통해 글자의 의미가 분명해지자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다산은 처음에 정조의 물음에 조문별로 대답을 하였는데, 훗날 다시 시경을 정리할 기회가 생기자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면서『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나의 「시경강의(詩經講義)」12권이 이미 차례가 정해지고 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강의의 체제는 오직 물음에 대답할 뿐이어서 물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종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라도 감히 서술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논한 것은 백에 하나도 거론하지 못해 조금 알고 있는 바를 다 나타낼 수 없었다. 경오년(1810년) 봄에 내가 다산에 있을 때에 학유(學游)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이청이 곁에 있었는데 산은 고요하고 해는 길어서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었다. 때때로 「시경강의(詩經講義)」에서 못다 한 내용을 이청에게 받아쓰게 하였다. 내가 중풍이 들고 몸이 피곤하여 정신이 맑지 않았는데도 이 일을 그치지 않은 것은 선성(先聖)?선왕(先王)의 도에 있는 힘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혹시 잘못되고 망령된 점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나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인용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정조의 조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이미 『시경강의(詩經講義)』가 이루어졌으나 당시의 방식은 임금의 물음에 대해서만 설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임금이 묻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감히 답할 수가 없어서 제대로 서술하지 못한 것이 많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다산은 그 정도를 백에 하나도 거론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경강의(詩經講義)』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를 통해 『시경(詩經)』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의 ‘국풍(國風)’ 조(條) 부분을 보면 ‘풍(風)’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보충해서 말한다. 풍(風)에는 두 가지 뜻이 있고 또한 두 가지 음이 있으니 의미하는 바가 아주 달라서 서로 통할 수가 없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풍으로써 교화하는 것은 풍교(風敎)?풍화(風化)?풍속(風俗)이니 그 음은 평성(平聲)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풍자하는 것은 풍간(風諫)?풍자(風刺)?풍유(風喩)이니 그 음이 거성(去聲)이다. 어떻게 하나의 ‘풍(風)’ 자가 거듭 두 가지의 뜻을 포함하고 두 가지의 음을 지녔는가? 「주역(周易)」에 “풍행지상(風行之上)이 관(觀)이니 선왕이 이 관괘(觀卦)로서 사방을 살피고 백성을 관찰한다.”라고 하였고, 「맹자(孟子)」에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풀들이 눕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풍교(風敎)의 퍼져나감으로 국풍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충신에게는 다섯 가지의 간(諫)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내가 그 풍간을 따르리라”고 하였고, 「백호통(白虎通)」에 “그 일을 보고 드러나기 전에 풍(風)으로 고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풍자에 인한 감동으로써 이름을 얻은 것이다. 「시서(詩序)」에서는 두 가지의 뜻을 겸비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주자의「시집전(詩集傳)」에서는 풍자를 제거하고 풍화만 남겨두었다. 그러나 풍자의 뜻을 여기에서 강론할 수가 있다.

다산은 훈고(訓?)와 고증(考證)을 통해 ‘풍(風)’의 의미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같은 ‘풍(風)’자 안에도 평성일 경우와 거성일 경우의 차이점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교화하는 ‘풍교(風敎)’, ‘풍화(風化)’, ‘풍속(風俗)’을 말할 때는 평성(平聲)으로 읽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풍간(風諫)’, ‘풍자(風刺)’, ‘풍유(風諭)’할 때는 거성(去聲)으로 읽힌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용례를 『주역(周易)』과 『맹자(孟子)』, 『공자가어(孔子家語)』등의 문헌을 통해 고증해 내고 있다. 그러면서 본래는 두 가지의 의미가 공존했었으나 주자의 『시집전(詩集傳)』에 이르러 ‘풍자’의 의미를 제거하고, ‘풍화’로 남겨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매우 예리한 지적이라고 판단된다. 이 외에도 다산은 시경에서 중요한 개념인 ‘육의(六義)’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시경의 체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 된다.

(공영달의 소(疏)에 이르기를, “부(賦)?비(比)?흥(興)은 시의 기능이요, 풍(風)?아(雅)?송(頌)은 시의 형식이다.”라고 했다.) 보충해서 말한다. 풍?아?송을 일컬어 세 가지 날줄(三經)이라하고 부?비?흥을 세 가지 씨줄(三緯)이라 한다. 내가 보건대, 「주례(周禮)」춘관(春官) <태사(太師)> 본문에 부(賦)?비(比)?흥(興)이 아(雅)?송(頌)보다 앞서 있음은 대개 풍시(風詩)에만 부?비?흥이 있고, 아?송에는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雅)는 모두 바르게 하는 말이고, 송(頌)은 찬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글이 은미(隱微)한 뜻에 힘쓰지 않는데, 어떻게 부?비?흥의 구별이 있겠는가? 풍(風)은 풍간(諷)으로, 더러는 의미를 펴고 베풀어서 스스로 알게 하고(賦), 더러는 물건의 비슷한 것에 견주어서 스스로 알게 하고(比), 더러는 깊고 먼 뜻을 의탁하여 스스로 알게 하니(興), 이것은 모두 풍시(風詩)의 체(體)이다. 그러므로 풍(風)?부(賦)?비(比)?흥(興)은 본래 육의(六義)의 네 부분이나 -「주례」에 이르기를, “태사가 여섯 시를 관장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합쳐져서 풍(風)이 된 것이다. 소아(小雅)에는 비록 비(比)?흥(興)에 가까운 것이 있으나, 그 지취(志趣)는 같지 않다.

인용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풍아송(風雅頌)은 삼경(三經)으로 시의 형식이 되고, 부비흥(賦比興)은 삼위(三緯)로서 시의 표현기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면서, 풍아송(風雅頌)과 부비흥(賦比興)의 차례가 풍(風)?부(賦)?비(比)?흥(興) 그리고 아(雅)?송(頌)의 차례로 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본래는 오직 ‘풍(風)’에 부(賦)?비(比)?흥(興)이 속해 있는 것이고, 아(雅)와 송(頌)에는 부(賦)?비(比)?흥(興)이 없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 근거로 ‘아(雅)’는 모두가 바르게 말하는 것이고, ‘송(頌)’은 오직 ‘찬미(贊美)’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문장은 ‘국풍(國風)’의 부비흥(賦比興)과 같이 ‘은미함(隱微)’에 힘쓰는 글이 아닌데, 어째서 부비흥(賦比興)의 구별이 따로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고 있다. 반면에 ‘풍(風)’은 ‘풍자(諷刺)’를 의미하기 때문에 문장의 성격 자체가 직접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은미함’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다산의 논리대로라면 ‘부비흥(賦比興)’을 통해 ‘풍시(風詩)’를 구현하게 되는 셈이다.
다음은 다산 정약용의 시에 대한 관점과 견해를 드러내고 있는 자료를 통해 시 인식(詩認識)과 한시 작품과의 상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릇 문장이라는 것은 어떠한 물건인가 하면, 학식이 속에 쌓여 그 문채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네. 이는 기름진 음식이 창자에 차면 광택이 피부에 드러나고 술이 배에 들어가면 얼굴에 홍조가 도는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들어간다고 이룰 수 있겠는가. 중화(中和)한 덕으로 마음을 기르고 효우(孝友)의 행실로 성(性)을 닦아 공경으로 그것을 지니고 성실로 일관하여 이로써 변하지 않아야 하네. 이렇게 힘쓰고 힘써 도(道)를 바라면서 사서(四書)로 나의 몸을 채우고 육경(六經)으로 나의 지식을 넓히고, 여러 가지 사서(史書)로 고금의 변천에 달통하여 예악형정의 도구와 전장법도의 전고(典故)를 가슴 속 가득히 쌓아놓아야 하네. 그래서 사물(事物)과 서로 만나 시비와 이해에 부딪히게 되면 나의 마음 속에 한결같이 가득 쌓아온 것이 파도가 넘치듯 거세게 소용돌이쳐 세상에 한번 내놓아 천하 만세의 장관으로 남겨보고 싶은 의욕을 막을 수 없게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네. 그리고 이것을 본 사람은 서로들 문장이라고 말할 것이네. 이러한 것을 일러 문장이라 하는 것이네.

인용문은 다산 자신의 문장관(文章觀)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다산은 문장(文章)이라는 것을 삶 속에서 도(道)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것들, 예컨대, 외적으로는 효우(孝友)와 같은 행실로 본성(本性)을 연마하여 공경을 몸에 지니고 성실함으로 일관됨을 유지하는 자세와 더불어 내적으로는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그리고 역사서와 고금의 저서들을 통해 지식을 체득해야 함을 전제 조건으로 삼고 있다. 그런 뒤라면, 특정한 상황이나 경우에 처했을 때, 마음속에 쌓아놓았던 것이 파도치듯 거세게 소용돌이쳐서 쏟아져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참된 문장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늘어놓음으로써 문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절로 우러나야 참된 문장이라는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음은 다산이 시(詩)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다.

시(詩)라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 근본적으로 낮고 추잡하면 억지로 맑고 고상한 말을 해도 조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뜻이 본디 편협하고 비루하면 억지로 달통한 말을 해도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않게 된다. 시를 배움에 있어 그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걸러내는 것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특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서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이치를 알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나뉨을 살펴서, 찌꺼기를 걸러 맑고 참됨이 발현하게 하면 된다.

다산이 인식하고 있는 시(詩)의 본질을 언급하는 인용문이다. 이처럼 다산의 시 인식(詩認識) 역시 앞에서 살펴본 문장에 대한 관점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시(詩)는 뜻을 말하는 것이므로 뜻이 낮거나 추잡하면 조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뜻이 낮거나 비루해지면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못하게 되므로 뜻을 헤아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다음은 다산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인데, 이 글에서 다산은 편지라는 형식을 빌어서 그리고 아들이기에 다른 양식의 글에서보다 더욱 진솔하고 과감하게 자신의 시 인식(詩認識)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번에 성수(惺?) 이학규(李學逵)의 시를 읽어보았다. 그가 너의 시를 논평한 것은 잘못을 잘 지적하였으니 너는 당연히 수긍해야 한다. 그의 자작시 중에는 꽤 좋은 것이 있기는 하더라만 내가 좋아하는 바는 아니더라. 오늘날 시는 마땅히 두보(杜甫)의 시를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모든 시인들의 시 가운데 두보(杜甫)의 시가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시경(詩經)』에 있는 시 300편의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시경』에 있는 모든 시는 충신, 효자, 열녀, 진실한 벗들의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의 발로로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하고 미운 것을 밉다고 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그러한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시를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뜻이 세워져 있지 아니하고, 학문은 설익고, 삶의 대도(大道)를 아직 배우지 못하고, 위정자를 도와 민중에게 혜택을 주려는 마음가짐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시를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니, 너도 그 점에 힘쓰기 바란다. ... 中略...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을 인용한답시고 걸핏하면 중국의 일이나 인용하고 있으니, 이건 또 볼품없는 일이다. 아무쪼록 『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국조보감(國朝寶鑑)』,『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징비록(懲毖錄)』,『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및 우리나라의 다른 글 속에서 그 사실을 뽑아내고 그 지방을 고찰하여 시에 인용한 뒤에라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나올 것이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이 지은 「16국회고시」는 중국 사람들도 책으로 간행해서 즐겨 읽던 시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사실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동사즐(東史櫛)』은 본디 이럴 때 쓰려고 만들어 놓은 것인데, 지금은 대연(大淵)이가 너에게 빌려줄 턱이 없으니, 우선 중국의 17사(史)에 있는 동이전(東夷傳) 가운데서 이름난 자취를 뽑아놓았다가 사용하면 될 것이다.

인용문과 같이 다산은 두보(杜甫)야말로 『시경(詩經)』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작가로 손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두보의 시 세계가 다산이 지향하고자 했던 시 세계와 가장 잘 부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나라를 사랑하고 시대를 아파하며,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찬미(讚美)할 줄 알아야 하고, 잘못된 것은 풍자(諷刺)할 줄도 알아야 하고,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할 줄 알아야 참다운 시(詩)가 된다는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다산은 용사(用事)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는데, 이는 주목할 만한 다산의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다산은 한시 작품에서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는데 대개의 경우가 중국(中國)의 역사를 인용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중국의 고사를 인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서인『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국조보감(國朝寶鑑)』등의 역사서와 우리나라 고유의 문헌을 대상으로 그 속에서의 사실을 통해 인용할 줄 알아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되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는 다산의 “조선시(朝鮮詩)” 선언과도 동일한 맥락에서 언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의 글도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이기 위해 작성한 서신인데, 이 글에서 다산은『시경(詩經)』시의 전형적 형식인 네 자로 된 시(四字詩)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가 인식했던 시의 근본에 관해 언급한다.

시(詩)가 반드시 힘써야 할 대상은 아니지만 성정(性情)을 도야(陶冶)하려면 시를 읊는 것도 상당히 도움이 된다. 예스러우면서 힘 있고, 기이하면서 우뚝하고, 웅혼하고, 한가하면서 뜻이 심원하고, 맑으면서 환하고 거리낌 없이 자유로운 그런 기상에는 전혀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가늘고 미미하고, 자질구레하고 경박하고 다급한 시에만 힘쓰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로다. 단지 율시(律詩)만 짓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루한 습관으로 실제로 다섯 자나 일곱 자로 된 고시(古詩)는 한 수도 보지 못했으니, 그 지취(志趣)의 낮고 얕음과 기질의 짧고 껄끄러움은 반드시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내가 요즈음 다시 생각해 보아도 자기의 뜻을 사실적(事實的)으로 표현하는 데나 회포를 읊어내는 데는 넉 자로 된 시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본다. 고시(古詩) 이후의 시인들은 남을 모방하는 것을 혐오하여 마침내 4자로 시 짓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요즈음 같은 처지는 4자시 짓기에 아주 좋구나. 너희들도 『시경(詩經)』「풍아(風雅)」의 근본 뜻을 깊이 연구하고 그 후에 도연명(陶淵明)이나 사령운(謝靈運)의 빼어난 점을 본받아 사언시(四字詩)를 짓도록 하여라. 무릇 시의 근본은 부자(父子)나 군신(君臣)?부부(夫婦)의 떳떳한 도리를 밝히는 데 있으며, 더러는 그 즐거운 뜻을 드러내기도 하고, 더러는 그 원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끌어내게 하는 데 있다. 그 다음으로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서 항상 힘없는 사람을 구원해 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고자 방황하고 안타까워서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는 간절한 뜻을 가진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시가 되는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의 이해(利害)에만 얽매일 것 같으면 그 시는 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은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서신인데, 다산의 시 인식(詩認識)이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밑줄 친 부분의 지적과 같이 다산은 자신의 뜻을 사실적(事實的)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네 글자로 된 시만큼 효율적인 형식은 없다고 본다. 그만큼 『시경(詩經)』의 정신을 형식적 측면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사언시(四言詩)와의 상관성

지금까지 다산의 시경론(詩經論)과 시 인식(詩認識)을 논의했다. 여기서는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다산 사언시(四言詩)의 구체적 작품들이 시경론 및 시인식과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하는 점을 중심으로 검토해 보겠다.
그런데, 다산이 남긴 한시 작품은 2,500여 수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작품 가운데 사언시(四言詩)는 불과 16수에 불과한 작품만을 남겼다. 한 가지 의문은 다산의 사언시(四言詩)가 왜 16수에 그치고 있는가? 하는 점과 그것도 대부분 유배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부터 말년에 이르는 시기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다산의 언급처럼 “나의 요즈음 같은 처지는 4자시 짓기에 아주 좋구나.(然如吾今日處地 正好作四言)”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불우한 상황에 처하여 스스로 울분을 토로하기에는 사언시(四言詩)가 제 격이라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시경(詩經)』의 시 정신을 충분히 표현해준다고 언급했던 사언시(四言詩)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1>
采蒿采蒿 / 匪蒿伊莪 / 群行如羊 / 遵彼山坡 / 靑裙?? / 紅髮俄兮 / 采蒿何爲 / 涕滂?兮
甁無殘粟 / 野無萌芽 / 唯蒿生之 / 爲毬爲科 / 乾之木? 之 / ?之?之 / 我?我? / 庶无他兮
쑥을 캐네. 쑥을 캐네. / 쑥이 아니라 그저 약초라네 / 무리의 행진이 마치 양떼처럼 / 저 산등성이 넘어가네. / 푸른 치마 혼자 몸 굽이니 / 붉은 머리 기우네! / 쑥은 캐서 무엇 하나. / 눈물만 쏟아지네. / 독에는 쌀 한 톨 없는데 / 들에는 움튼 싹조차 없네! / 오직 쑥만 자랐으니 / 둥글고 넓적하게 / 말리고 또 말려서 / 담갔다가 소금에 절여 / 죽 쑤어 먹어야지 / 달리는 살 수 없네.

이 작품에는, “채호(采蒿)는 흉년을 걱정하여 쓴 시이다. 가을이 되기도 전에 기근이 들어 들에 푸른 싹이라곤 없었으므로 아낙네들이 쑥을 캐어다가 죽을 쑤어 그것으로 끼니를 때웠다.(采蒿 閔荒也. 未秋而饑 野無靑草 婦人采蒿 爲?以當食焉)”이라는 병서(竝書)가 함께 남아 전한다. 이를 통해 다산이 이 시를 창작하게 된 동기와 작품 해석의 단서를 엿볼 수 있다. 동시에 당시의 창작상황에 대한 소상한 기록이 남아 전하고 있기에 이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돕는다.

내가 다산 초당에 있을 때, 그 해에 크게 가물어 겨울에서부터 이듬해 봄을 거쳐 입추가 될 때까지 들에는 푸른 풀 한 포기 없이 그야말로 붉은 땅이 천리였다. 6월 초가 되자 유랑민들이 길을 메우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아프고 보기에 처참하여 살고 싶은 의욕이 없을 정도였다. 죄를 짓고 귀양살이 온 몸인지라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기에 ‘고사리’에 대해서 아뢸 길도 없고, 그림도 바칠 길이 없어서 그때그때 본 것들을 시가(詩歌)로 엮었는데, 그것은 처량한 쓰르라미나 귀뚜라미가 풀밭에서 슬피 울듯이 그들과 함께 울면서 올바른 이성과 감정으로 처지의 화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랫동안 써 모은 것이 몇 편이 되어 이름 하기를 ‘전간기사(田間紀事)’라고 했다.(在茶山草菴 是歲大旱 爰自冬春 至于立秋 赤地千里 野無靑草 六月之初 流民塞路 傷心慘目 如不欲生 顧負罪竄伏 未齒人類 烏昧之奏 無階銀臺之圖莫獻 時記所見 綴爲詩歌 盖與寒蟄冷? 共作草間之哀鳴 要其性情之正 不失天地之和氣 久而成編 名之曰 田間紀事.)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서 이 작품이 어떻게 창작되었는지 하는 배경을 알 수 있다. 다산은 이처럼 유배지에서 극심한 가뭄에 고통 받으며 결국에는 유랑민이 되어 떠돌이 삶을 살아가는 민중의 고달픈 삶을 직접 체험하면서『시경(詩經)』의 대표적 형식에 해당하는 사언시(四言詩)를 통해 작품을 창작하고 있다.

<2>
我采葛兮 / 于山之麓 / 其葉沃兮 / 瞻望叔兮 / 匪采葛兮 / 瞻望叔兮
我采葛兮 / 于山之岡 / 其節荒兮 / 瞻望兄兮 / 匪采葛兮 / 瞻望兄兮
我采葛兮 / 于澗之? / 有蕃其? / 瞻望子兮 / 匪采葛也 / 瞻望子兮
心之?矣 / 不可?兮 / 瞻望不見 / 不可佇兮 / 雖有旨酒 / 不可?兮
내가 칡을 캐기를 / 저 산기슭에서 캐노라 / 그 잎이 무성함이여 / 우리 숙부를 사모하노라 / 칡을 캐는 것이 아니라 / 우리 숙부를 사모함이라 //
내가 칡을 캐기를 / 저 산등성이에서 캐노라 / 그 마디가 큼이여 / 우리 형을 사모하노라 / 칡을 캐는 것이 아니라 / 우리 형을 사모함이라 //
내가 칡을 캐기를 / 저 시냇가에서 캐노라 / 무성한 이 덩굴이여 / 내 자식을 생각하노라 / 칡을 캐는 것이 아니라 / 내 자식을 생각함이라 //
이 마음 애가 타고 아파서 / 누그러뜨릴 수가 없네. / 보아도 보이지 않아 / 오래 서 있을 수도 없네. / 아무리 맛있는 술이 있어도 / 걸러 마실 수가 없다네.

이 작품 역시『시경(詩經)』의 대표적인 사언시(四言詩) 형식과 표현기교를 따르고 있음이 확인된다. 동시에 제목과 함께, “채갈(采葛)은 귀양살이를 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슬퍼한 말이다. 부자, 형제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采葛 遷人自傷也. 父母兄弟離析焉)”라고 병서(竝書)되어 전한다. 따라서 어떤 맥락에서 창작되었으며 어떤 의미로 읽어야하는지 방향성이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총 4장의 형식이다. 산기슭에서부터 출발하여 산등성이까지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시상을 전개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1장에서 시상 전개가 “산기슭(麓)에서 출발하는 것은 높은 데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출발하여 오르기 때문(麓, 山足也. 升高由卑)”이라고 언급했다. 아울러 칡잎이 뿌리를 덮고 있는 것이 마치 아비가 자식을 감싸고 있는 모습과 같기 때문에 산등성이에서 본 칡을 보며 ‘숙부’를 떠올리고 사모한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시상의 흐름이 2장에서는 ‘산등성이’로 올라 “같은 뿌리에서 나서 마디를 달리하는 칡의 모습을 보며 형제를 떠올리고 있음(同根異節 兄弟也)”이 확인된다. 다음으로 3장에서는 시냇가로 가서 길게 뻗어 있는 덩굴을 바라보며 자식을 떠올리고, 마지막 4장에 가서는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상황과 술로도 달랠 수 없는 깊은 시름을 형상화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3>
豺兮狼兮 / 旣取我犢 / 毋?我羊 / ?旣無? / ?旣無裳 / 甕無餘? / 甁無餘糧 / 錡釜旣奪
匕?旣攘 / 匪盜匪寇 / 何爲不臧 / 殺人者死 / 又誰?兮
승냥이여 이리여! / 이미 우리 송아지 채갔으니 / 우리 양은 물지 마라 / 옷상자에는 이미 저고리도 없는데 / 옷걸이에는 이미 치마도 없는데 / 항아리에는 남은 소금도 없고 / 쌀독에는 남은 쌀도 없는데 / 솥과 가마도 벌써 뺏어가고 / 숟가락 젓가락 다 털어갔다네 / 도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니건만 / 어째서 감추지 못했는가! / 사람을 죽인 자가 죽었는데 / 또 누구를 죽이려나?

이 작품에도 제목과 함께 병서(竝書)가 남아있어 작품 해석과 창작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시랑(豺狼)은 백성들의 이산(離散)을 슬퍼한 시이다. 남쪽에 두 마을이 있었는데, 하나는 용촌(龍村)이고, 또 하나는 봉촌(鳳村)이다. 용촌에 갑이라는 자가 살았고, 봉촌에 을이라는 자가 각기 살고 있었는데, 서로 장난삼아 때린 끝에 을이 우연히 병이 들어 죽었다. 두 마을 백성들은 관가의 검시(檢屍)가 두려워서 갑으로 하여금 자진하도록 권했더니 갑은 그것을 흔연히 승낙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마을을 무사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에 관리들이 그 사실을 알고는 두 마을의 죄상을 캐면서 돈 3만 냥을 뜯어냈는데, 두 마을에서는 그것을 마련하느라 실오라기 하나 곡식 한 톨 남은 것이 없어 그 지독함이 흉년보다 더 심했다. 그리하여 그 관리들이 돌아가는 날 두 마을도 다 떠나고 오직 부인 한 사람이 남아서 현령(縣令)에게 그 사정을 호소했더니, 현령이 하는 말이 ‘네가 나가서 찾아보라’고 했다(豺狼 哀民散也. 南有二村, 曰龍曰鳳, 龍有某甲 鳳有某乙 偶戱相軀 乙者病斃 二村之民 畏於官檢 令甲者裁 甲欣然自死 以安村里 旣數月吏知之 聲罪二村 徵錢至三萬 寸布粒粟 靡有遺者 其毒急於凶年 吏歸之日 二村則流有一婦訴于縣令 令曰 爾出而索之)”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처럼 부패한 공직사회와 탐관오리들의 횡포를 고발한 작품이다.

<4>
有兒雙行 / 一角一羈 / 角者學語 / 羈者?垂 / 失母而號 / 于彼叉? / 執而問故 / 嗚咽言遲 / 曰父旣流 / 母如羈雌 / 甁之旣? / 三日不炊 / 母與我泣 / 涕泗交? / 兒啼索乳 / 乳則枯萎 / 母?我手 / 及此乳兒 / 適彼山村 / ?而飼之 / ?至水市 / 啖我以飴 / ?至道越 / 抱兒如? / 兒旣睡熟 / 我亦如尸 / 旣覺而視 / 母不在斯 / 且言且哭 / 涕泗漣? / 日暮天黑 / 栖鳥群蜚 / 二兒伶? / 無門可? / 哀此下民 / 喪其天? / 伉儷不愛 / 慈母不慈 / 昔我持斧 / 歲在甲寅 / 王眷遺孤 / 毋?殿屎 / 凡在司牧 / 毋敢有違
어떤 아이 둘이서 걸어가는데 / 동생은 쌍상투하고 누이는 묶은 머리를 했네 / 동생은 말을 배울 나이고 / 누이는 다박머리 드리웠네. / 어미를 잃고 우는 / 저 두 갈래 길에서 / 붙잡고서 연유를 물으니 / 흐느껴 울며 말을 못 하네 / 말하길 아빠는 오래 전에 집을 떠났고 / 어머니는 짝을 잃었어요. / 쌀독은 벌써 비었기 때문에 / 사흘을 굶었어요. / 엄마가 나를 안고 흐느껴 울며 / 눈물 콧물 두 뺨에 얼룩졌어요. / 동생은 울면서 젖을 찾았지만 / 젖은 말라서 붙어버렸어요 / 엄마는 내손 잡고 / 이 젖먹이를 업고서 / 저 산골을 가서는 / 구걸해서 먹였어요. / 어시장에 이르러서는 / 제게 엿도 먹여줬어요 / 이 길까지 데리고 와서는 / 동생을 사슴 새끼 품듯 안고 잤어요. / 동생은 세상모른 채 잠이 들었고 / 저 역시 죽은 사람처럼 잠들었지요. / 깨고 나서 보았지만 엄마는 여기 없었어요. / 말하다가 울다가 / 눈물 콧물 줄줄 흐르네. / 날 저물어 어두워지면 / 새들도 집을 찾는데 / 외로운 두 오누이 / 찾아갈 집이 없구나. / 슬프도다! 이 백성들 / 그 하늘의 떳떳함마저 잃었구나! / 지아비와 지어미가 사랑하지 못하고 / 엄마도 제 자식 돌보지 않는구나. / 갑인 년에 이 몸이 / 암행어사 되었을 때, / 임금님 분부하셨지 고아를 보살펴서 / 고생 없게 하라고 / 벼슬하는 사람들아 / 이 말 감히 어기지 마시오.

이 작품 역시 제목과 함께 놓여있는 병서(竝書)를 통해 작품의 창작 동기와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유아(有兒)는 흉년을 걱정한 시이다. 지아비는 지어미를 버리고, 어미는 자식들을 버렸다. 일곱 살 먹은 여자 아이가 자기 동생을 데리고 길거리를 방황하면서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엉엉 울고 있었다.(有兒 閔荒也. 夫棄其妻 母棄其子 有七歲女子 携其弟 彷徨街路 哭其失母焉)”는 기록이 작품의 창작 동기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작품 역시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에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했다. 사언시(四言詩)의 형식을 통해 시상이 전개되고 있으나 표현적 측면이나 정서적 측면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현실에서 직접 체험한 것을 기록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운 심정을 배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다산이 주목하고 있는 현실은 처참한 현실 상황이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이라는 천륜마저 무너진 상황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 된 채 거리를 헤매며 울고 있는 어린 남매의 모습을 본 다산은 이렇게 안타까운 상황을 사언시(四言詩)라는 형식을 선택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5>
蘭兮?兮 / 生彼中陂 / 友兮洵美 / 秉德不頗 / 豈無他好 / 念子實多 //
蘭兮?兮 / 生彼中丘 / 凡今之人 / 不其疾? / 念子不忘 / 中心是猶 //
蘭兮?兮 / 生彼蓬蒿 / 萎兮?兮 / 誰其?兮 / 念子不忘 / 中心是勞 //
길게 뻗은 난초 줄기 / 저 산비탈에 자라는데 / 아름답다 우리 벗 / 덕을 지켜 반듯하다 / 다른 벗이 어찌 없겠냐만 / 그대 생각 간절할 뿐 //
길게 뻗은 난초 줄기 / 저 언덕에 자라는데 / 지금 세상 보통 사람 / 지조가 너무 빨리 변해버려 / 그대 생각 잊지 못해 / 이 내 가슴 안절부절 //
길게 뻗은 난초 줄기 / 저 쑥밭에 자라는데 / 메마르고 거친 포기 / 어느 누가 손질 할꼬. / 그대 생각 잊지 못해 / 이 내 가슴 애탄다오. //

이 작품은 앞서 살펴본 작품들과 달리 ‘찬미시(讚美詩)’에 해당한다. 앞의 시 작품들이 ‘풍자시(諷刺詩)’에 해당한다면 이 작품은 그와 달리 시적 대상을 찬미하고 있는 작품이다. 전체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곧고 길게 뻗은 난초를 보며 덕(德)을 지키며 살아가는 벗의 모습을 형상화했고, 2장에서는 절개와 지조를 갖춘 벗을 찾기 어려움을 한탄하면서 올곧은 벗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으며, 3장에서는 어지러운 현실에서 올곧음을 간직한 벗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다산은 본래『시경강의(詩經講義)』를 통해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시경 해석의 근간이 되는 ‘찬미(讚美)’와 ‘풍자(諷刺)’의 두 가지 본원적 기능과 의미를 재현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위에서 살펴본 작품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다산이 사언시(四言詩)를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시경(詩經)의 의미와 기능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시경론과 시 인식을 토대로 살펴보았을 때, 다산의 사언시 작품이 지닌 미의식(美意識)은 현실 비판적 요소가 강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풍자적이면서도 기법 면에서는 사실주의적 측면이 매우 강하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미의식은 다산의 언급처럼 부단한 자기수양과 성실한 공부를 통해 한 시대를 관통할 수 있는 예리한 통찰력과 나라를 걱정하고 시대를 고민할 수 있는 현실 인식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점은 다산의 시경강의(詩經講義)서도 강조되었던 것처럼 시의식과 실제 그의 시세계에서도 동일한 지향을 보이고 있었다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4. 결론

다산 정약용은 전라남도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통해 학문적 온축이라는 다행을 얻을 수 있었다. 유배라는 고통스러운 시간 동안 수많은 경전들을 연구하며 유배의 의미를 승화시킬 수 있었던 행복을 누린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시경강의는 그 결과물의 하나였다. 그는 시경에 대한 연구를 토대로 한시의 형식 가운데 사언시(四言詩)를 선택하여 총16수를 창작했다. 다산은 이를 통해 시경의 시(詩) 정신을 구현하고, 시경에 대한 의미와 해석의 논란을 해소해 보고자 했다. 그런 점에 주목하여 이 논문에서는 사언시(四言詩)를 통해 다산이 말하고 싶었던 바가 무엇이었나 하는 점을 밝히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다. 그 결과 다산은 사언시(四言詩)를 통해 풍자(諷刺)와 찬미(讚美)뿐만 아니라 시대를 근심하고 민중의 고달픈 삶을 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이러한 사언시(四言詩)를 통한 시적 형상화 방식이『시경(詩經)』이 지니고 있었던 본원적인 의미와 기능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언시(四言詩)라는 형식을 통해 시경이 지니고 있었던 본래 의미를 되살려보고자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산이 남긴 작품의 분량을 고려할 때, 사언시(四言詩)는 많은 양을 차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만 시(詩)가 지닌 본원적 의미와 기능이 해명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는 계속될 연구 과제로 남겨두겠다.

* 참고문헌은 각주로 대신함.

<abstract>

The correlation between 4 words poem(四言詩) and Sikyong(詩經) theory as well as poem consciousness of Dasan Jung Yak Yong

Jun kyong won(Kon Kuk univ)

Dasan Jung Yak Yong lived in exile for 18years in Gangjin of Julanamdo. He studied lots of scriptures during that time. The lecture of Sikyong was one of the results. He wrote 16 poems using 4 words poem form(四言詩) among the forms of chinese poetry based on the study of Sikyong. Dasan tried to embody the poem sprit of Sikyong.
The aim of this thesis is to clear what Dasan wanted to say through 4 words poem. Through 4 words poem, Dasan satirized and praised, besides concerned the times and configured a hard life of people. Dasan believed this kind of configuration method is the best way to reflect the original spirit Sikyong had. Therefore he tried to restore a original meaning Sikyong had.
Dasan's 4 words poem is not many. However it suggests us many things related with the problem how to interpret Sikyong. A profound studies on it should keep doing in the future.

* key word : 4words poem form(四言詩), Sikyong(詩經) theory, poem consciousness, the original spirit Sikyong(詩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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